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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화학적 거세 헌법소원 제기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5-05-13 11:45:23  |   icon 조회: 4560
[보도자료]
화학적 거세 헌법소원 제기

치료 효과 불명확, 부작용 우려…신체의 자유 침해
동의 없는 강제치료는 실효성 없어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법원의 판결은 물론 검사의 청구나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법무부 소속 위원회가 이른바 ‘화학적 거세’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이하 약물치료법) 등에 대한 헌법소원이 지난 8일 헌법재판소에 제기되었습니다.

3. 이번 헌법소원의 청구인 이아무개씨는 2001년 특수강간죄로 징역 7년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 받고 2007년 징역형 집행을 종료한 후 보호감호 집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감옥에 있는 14년 동안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영어영문학과 국어국문학 등 학사 학위 2건을 취득했습니다. 2007년에는 장기기증을 서약했고 2010년에는 성실한 수용 생활로 교도소장의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4년 4월 21일 치료감호심의위원회는 이씨가 성도착증환자로서 성폭력범죄의 재범 위험성이 있다며 그해 6월 26일자로 가출소시키고 4월 28일부터 3년간 약물치료를 명했습니다. 이씨는 2014년 8월경에 보호감호 종료로 출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치료감호심의위원회는 화학적 거세를 위해 이씨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가출소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에 이씨는 2014년 6월 약물치료명령부과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4. 지난 4월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반정우)는 치료감호심의위원회가 이씨에게 약물치료명령 결정서를 적법하게 송달하지 않았으므로 약물치료명령부과처분은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항소심 판결 선고 때까지 이씨에 대한 약물치료 집행을 직권으로 정지했습니다. 이씨는 위 소송의 1심 계류 중 약물치료법 등에 대해 위헌제청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자 이번 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입니다.

5. 화학적 거세는 성폭력범죄의 추가 범행을 방지한다는 입법 목적의 정당성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서 약물에 의한 성호르몬의 조절·통제로 공격적인 성적 행동을 예방할 수 있다는 치료 효과에 대한 실증적 연구 결과가 없고 △약물치료가 중단될 경우 성기능이 회복될 수 있어 재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투입되는 비용에 비해 그 효과는 제한적이며 △강제적인 약물치료는 당사자의 강력한 심리적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치료의 효과를 제대로 발현시킬 수 없으므로 화학적 거세는 성폭력 재범 방지를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6. 화학적 거세는 강제로 당사자에게 약물을 투여하여 신체에 직접적인 침습을 가해 육체적·정신적·심리적 영향이 심대한 반면 사용되는 약물은 체중·혈압·골밀도 등에 부작용을 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치료약물의 효과는 통상 1개월 정도의 잠정적 효과에 불과하지만, 당사자는 최대 15년의 범위 내에서 장기간 주기적으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점진적·누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충분한 연구가 된 것인지 의문이므로 화학적 거세는 피해의 최소성 요건과 법익의 균형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7. 약물치료법에 따라 화학적 거세를 할 수 있는 3가지 경우를 비교하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오는 14일 공개변론을 할 예정인 약물치료법 제4조 제1항 등 위헌제청 사건(2013헌가9)은 아래 [표]의 유형1에 해당합니다.

[표] 화학적 거세 대상자 비교 (첨부파일 참고)

8. 청구인은 약물치료법이 시행된 2011년 7월 이전 범죄자로 약물치료명령 당시 ‘피보호감호자’(유형3)였습니다. 사회보호법이 폐지된 2005년 8월 이후 선고를 받은 ‘성폭력 수형자’(유형2)의 경우 당사자가 동의해야만 화학적 거세를 할 수 있지만, 청구인과 같은 ‘피보호감호자’의 경우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4월 법무부 정보공개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수형자 중 약물치료에 동의한 수형자는 당시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별첨1. 법무부 정보공개자료) 게다가 성폭력 수형자의 경우 검사가 치료명령을 청구하여 법원에서 판단하는 반면, 피보호감호자는 검사의 치료명령 청구와 법원의 판단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법무부 소속 위원회인 치료감호심의위원회에서 판단합니다. 성폭력 수형자와 피보호감호자는 판결확정시점이 구 사회보호법 폐지 이후인지 이전인지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재범의 위험성 여부와 같은 실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청구인의 평등권도 침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9. 한편 피보호감호자는 성폭력 수형자에 비해 범죄 발생시점이 오래되고 수감 기간이 길어 재범의 위험성이 더 낮다고 볼 수 있는 점에서도 평등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1년 범죄를 저지르고 2002년에 징역 7년,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은 피보호감호자 갑(甲)과 2008년에 범죄를 저지르고 2009년에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성폭력 수형자 을(乙)은 같은 2015년경에 출소하지만, 을(乙)에 비해 갑(甲)은 훨씬 오래 전에 범죄를 저질렀고 보호감호처분으로 인해 2배 가량의 수감 기간도 치루게 됩니다. 그런데 을(乙)은 대상자가 동의를 하지 않으면 약물치료를 받지 않아 사실상 약물치료가 면제되는 반면, 갑(甲)은 대상자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강제로 약물치료를 받게 됩니다(아래 그림).

10. 화학적 거세는 성폭력범에 대한 원시형법, 응보형법으로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lex talionis)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절도를 한 사람이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범죄자의 팔을 자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근대로 넘어 오면서 범죄자에 대한 신체형은 교정·교화를 목표로 하는 자유형으로 발전한지 오래입니다. 우리 위원회는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자유, 즉 신체의 완전성이 외부의 물리적 힘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을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화학적 거세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할 것을 기대합니다.

11.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됩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12.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1. 법무부 정보공개자료 (별도 파일)
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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