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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검찰, 서울구치소 노역수형자 가혹행위한 교도관 상해죄로 기소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5-11-18 10:52:45  |   icon 조회: 4712
[보도자료]
검찰, 서울구치소 노역수형자 가혹행위한 교도관 상해죄로 기소

금속보호대·발목보호대·머리보호구 채우고 폭행…사건 발생 4년여 만에 기소
폭행 가담·국가인권위 진정 방해 혐의 교도관들 불기소
유엔 “보호장비 종료 교도관 결정에 달려있어 우려”…외부 통제 장치 마련해야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구치소에서 노역수형자에게 가혹행위를 한 교도관이 심판대에 올랐습니다. 지난달 30일 수원지검은 벌금 미납으로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노역수형자 이아무개씨를 폭행하여 상해를 입힌 혐의로 당시 서울구치소 교감이던 교도관 박아무개씨를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박씨는 2011년 6월 6일 서울구치소 A관구 기결팀 사무실에서 이씨에게 수갑과 발목보호대, 금속보호대, 머리보호구를 채우고 바닥에 앉아 있는 이씨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온몸을 밟아 상처를 입혔습니다. 아래는 당시 이씨가 착용한 보호장비로,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아래 형집행법) 시행규칙에 그 사용방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3. 우리 위원회는 이번 검찰의 기소가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인신구속 업무에 관한 직무 종사자의 경우 다른 공무원에 비해서 폭행 등 각종의 유형력으로 피의자, 수용자 등 인신구속 대상자를 제압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사건은 교도관이 직권을 남용하여 구금 상황에 놓여 있는 피해자에게 사적으로 가혹행위를 가한 것으로 수형자의 교정·교화라는 교도관의 직무를 저버린 것은 물론 법치주의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 깨뜨린 것입니다. 법무부는 이번에 기소된 교도관 박씨를 즉시 직무에서 배제하고, 박씨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입은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진상조사에 착수해야 할 것입니다.

4. 한편, 검찰은 A관구 기결팀 사무실에서의 폭행(1차 폭행)만 기소하고 이어 벌어진 B관구 미결1팀 사무실에서의 폭행(2차 폭행)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했습니다. 박씨는 폭행 장면을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캠코더 증거와 사건 현장 CCTV 증거의 인멸을 교사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검찰은 피해자 이씨가 고소한 교도관 5명 가운데 1명만을 기소했을 뿐, 폭행에 직접 가담한 혐의가 짙은 교도관 1명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했습니다. 사건 직후 이씨가 작성한 국가인권위 진정서의 발송을 거부한 혐의를 받은 나머지 교도관들도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법무부 소속 교도관에 대한 ‘제 식구 챙기기’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피해자 이씨는 불기소 부분에 대해 항고하여 검찰의 추가 수사를 촉구할 계획입니다.

5. 우리 위원회는 집단 폭행에 따른 고통을 겪은 피해자가 검찰의 수사 지연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겪었음을 강조합니다. 검찰의 이번 기소 결정은 사건 발생 4년여 만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검찰은 사건을 △수원지검 평택지청 △서울중앙지검 △수원지검 평택지청 △수원지검으로 거듭 이송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미 2011년 11월 국가인권위는 교도관A의 가혹행위에 대해 검찰총장에게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국가인권위는 결정문을 통해 이씨의 주장은 매우 구체적인 데 반해 교도관 박씨의 주장은 일관성이 없고 관련 수용기록과도 상이함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진정사건으로 처리하여 조사한 수원지검 평택지청은 2013년 4월 혐의없음(증거불충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검찰은 “진정인의 주장에 부합하는 정황증거인 위 진료기록부의 기재, 진정인에 대한 징계기록에 ‘자해’에 대한 기재가 없는 사실, 인권위 서면진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 등에 비추어, 진정인의 주장과 같은 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당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6. 2013년 5월 이씨가 평택지청에 고소장을 접수했으나, 평택지청은 같은해 9월 이씨에 대한 조사를 했을 뿐 실질적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평택지청은 사건 당시 목격자인 참고인들이 평택지청에 출석하기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2013년 12월 참고인들의 주소지인 서울중앙지검에 수사촉탁을 하면서 시한부 기소중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참고인들이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평택지청은 2014년 9월초 수사를 재기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 9월말 평택지청은 가해자가 근무지를 옮겨 관할이 없다며 수원지검으로 사건을 이송해버렸습니다. 2014년 11월 우리 위원회는 수원지검장에게 신속하고도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이씨는 검찰 수사가 지연되자 민사소송을 통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기 위해 2014년 5월 가해자들과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법에 내기도 했습니다.

7. 이번 사건은 교정시설에서 보호장비가 악용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징벌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징벌과는 달리 보호장비 사용 여부는 원칙적으로 교도관의 권한이어서 자의적으로 남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전체 보호장비 사용 건수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둘 이상의 보호장비를 사용함으로써 수용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보호장비 사용 기간이 1일을 초과하는 경우가 전체 사용 건수의 30~40%에 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7일 이상 보호장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호장비의 사용은 도주나 폭행, 손괴, 자해 등 급박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이므로 그 성질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당 수용자를 격리수용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위험성은 사라지거나 현저하게 감소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보호장비를 장기간 사용하는 관행이 지속되는 것은 보호장비의 사용이 필요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 수용자에 대한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형집행법 제99조 “교도관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보호장비를 사용하여야 하며, 그 사유가 소멸하면 사용을 지체 없이 중단하여야 한다”(제1항), “보호장비는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제2항)는 규정은 선언에 불과한 것이 현실입니다(아래 표는 2013년 국정감사에서 법무부가 서기호 의원(정의당)에게 제출한 자료).

8. 이달 초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한국정부에 대한 심의 후 발표한 최종견해(Concluding observations)에서 “구금시설 내에서의 보호장비 사용이 주로 징벌의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고 및 그 사용의 종료시점이 교도관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형집행법 제99조 제2항(보호장비는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의 이행 여부가 반드시 모니터링될 수 있도록 하고, 보호장비의 사용이 법적으로 정해진 한도를 따를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교도관의 보호장비의 남용을 외부에서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유엔의 권고를 즉각 이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별첨1.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최종견해 한글본(번역), ※별첨2.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최종견해 영문본(원문))

9.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별첨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10. 많은 취재와 보도를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1.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최종견해 한글본(번역) (별도파일)
2.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최종견해 영문본(원문) (별도파일)
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별첨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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