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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외부성기 형성수술 받지 않은 성전환자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국내 첫 법원 결정에 대한 논평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7-02-16 14:22:47  |   icon 조회: 1777
보/도/자/료

“외부성기 형성수술 없이 성전환자 여성
성별정정(남→여) 가능”

여성성기 형성수술 받지 않은 성전환자 여성(Male-to-Female),
국내 처음으로 청주지법 영동지원에서 성별정정 허가결정 받아

2013년 3월, 서울서부지법의 외부성기 형성수술 받지 않은
성전환자 남성(Female-to-Male)에 대한 결정과 더불어,
성전환자의 인격권을 수호하는 중요한 결정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2월 14일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재판장 신진화)은 외부성기 형성 수술을 받지 않은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전환자(성전환자 여성)에 대하여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을 여성으로 정정하는 것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허가했습니다. 16일 우리는 이번 결정에 대한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별첨1. 논평)

3. 법원은 위 결정에서 성별정정 허가에 있어 “본인이 반대 성으로의 귀속감과 안정을 느끼는 데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외부적, 사회적 성별 기준에 따른 완벽한 또는 매우 유사한 정도의 외부성기 전환까지 마쳐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전환자들의 특성은 최대한 반영될 필요가 있다.”라면서, “(2006년 성전환자 성별정정을 허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정은) 외부성기 수술을 마치지 않으면 성별정정 허가를 명시적으로 불허하는 취지는 아니라고 해석된다. 이와 같이 해석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헌법상 기본권인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과 충돌하게 될 우려도 있다.”라고 설시하였습니다.

4. 이 소송은 SOGI법정책연구회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아래 ‘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였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천주교인권위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5.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1. 논평
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별첨1
논평


외부성기 형성수술 받지 않은 성전환자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국내 첫 법원 결정에 대한 논평

“성전환자가 처한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성별정정에 있어 외부성기 수술 요구의 위헌성을 체계적으로 밝힌 이번 결정을 환영하며, 성전환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성별정정 기준 개정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2017년 2월 14일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재판장 신진화)은 외부성기 형성 수술을 받지 않은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성전환자(성전환자 여성)에 대하여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을 여성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그 동안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자(성전환자 남성)에 대해서는 2013년 3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이 외부성기 형성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이래 동일한 취지의 허가결정이 다수 있어 왔다. 그러나 성전환자 여성에 대해서 외부성기 형성수술 없이 성별정정을 허가한 것은 이번 결정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영동지원의 결정은 큰 의의가 있다.

본 결정에서 법원은 2006년의 대법원 결정 및 현행 대법원 예규의 해석과 외부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가 처한 구체적 현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결정이유를 밝히고 있다.

먼저 신체외관상 여성으로의 변화와 여성으로서의 성별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 외부성기 형성 수술은 필수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외부성기 형성 수술이 의료기술상의 한계와 후유증의 위험이 크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신청인과 같이 외부성기 수술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전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다음으로 외부성기 형성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는 사고나 질병으로 생식기 등을 절제한 경우와 다르지 않음에도 성별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점, 공동체 내 다른 구성원이 혐오감, 불편함 등을 느낀다는 주장은 다양성 존중과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민주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외부성기 형성 수술을 받지 않아 성전환자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 국가가 개입할 의무는 없다는 점 등을 통해 성별정정에 있어 외부성기 형성 수술을 요구할 근거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한 국가의 신분관계와 개인의 행복추구권, 인격권은 분리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성별 특성에 비추어 신분관계 정립에 있어 성전환자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2006년의 성별정정에 대한 대법원 결정과 대법원 예규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 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의 해석상 성별정정에 있어 외부성기 형성 수술은 절대적 요건이 아니며, 오히려 이를 절대적인 요건으로 할 경우 헌법상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과 충돌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본 결정은 성별정정에 있어 외부성기 요구의 부당성에 대한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본 결정은 수술 자체의 위험성이나 한계보다는 성별정정을 받지 못한 성전환자가 구체적 현실 속에서 겪는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고통 등에 보다 초점을 두고 이에 비추어 성별정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성전환자의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할 것이다. 또한 대법원 결정 및 예규의 의의를 자세히 분석하여 외부성기 수술 요구의 위헌성을 다시금 확인하였다는 점에서도 환영할 만하다.

다만 본 결정에서 성별정정의 요건 중 ‘반대 성으로의 신체를 갖춤’에 대해서 호르몬 분비기관, 생식능력의 제거를 결정적 요소로 보고 있으며, 신청인에 대해서도 양측 고환절제수술을 받아 생식능력이 없어졌다는 점을 허가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결정에서 언급하고 있는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외국의 경우 단지 외부성기 형성 수술만이 아니라 생식능력 제거를 포함한 외과수술 자체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문은 생식능력 제거 요건은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올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생식능력제거 수술 역시 성전환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며 성전환자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 등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외부성기 수술 요구와 동일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국제인권기준에 비추어도 성전환자에 대한 불임수술 요구는 성전환자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점, 이미 유럽 및 남미에서는 성별정정에 있어 생식능력 제거 등 외과수술을 요구하지 않는 국가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에 비추어 생식능력 제거 요건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본 결정 및 대법원의 태도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본 결정은 2013년 서울서부지방법원의 결정에 이어 외부성기수술을 받지 못하였거나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상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성전환자의 인권 증진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판례가 될 것이다. 본 결정이 한 번의 사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법원에서도 이와 같은 기준을 적용한 결정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성전환자가 겪고 있는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는 대법원 예규의 개정과 나아가서 성별정정에 대한 입법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017년 2월 16일

성적지향·성별정체성(SOGI)법정책연구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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