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건설노동자 국가폭력 규탄 인권단체 기자회견 - 탄압을 멈춰라! 존엄을 짓는 건설노동자의 투쟁이 인권이다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23-05-23 15:25:31  |   icon 조회: 291
[보도자료]

[건설노동자 국가폭력 규탄 인권단체 기자회견]
탄압을 멈춰라! 존엄을 짓는 건설노동자의 투쟁이 인권이다

2023.5.23.(화) 1:00 경찰청 앞

진행순서
·사회 민선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발언
이세훈 건설노조 교육국장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이호영 공권력감시대응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참가자 메시지 낭독
건설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

주최: 건설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인권단체
건강한노동세상, 경동건설 고 정순규 유가족, 공권력감시대응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구속노동자후원회, 국제민주연대, 김용균재단, 다산인권센터, 대구인권단체연석회의, 대구청년유니온, 매체비평우리스스로,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생명안전 시민넷, 서울인권영화제,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손잡고, 어린보라 : 대구청소년페미니스트모임,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인권센터, 인권연구소 창, 인권운동공간 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운동사랑방, 인천사람연대, 인천인권영화제, 인천차별금지법제정연대, 장애여성공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제주평화인권센터, 진보네트워크센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충남인권교육활동가모임 부뜰, 플랫폼C,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알,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의 권리와 인간 존엄성 파괴, 건설노동자에 대한 국가폭력 규탄

<기자회견 취지>

지난해 12월 경찰청이 200일간 ‘건설현장 갈취·폭력 등 조직적 불법행위’ 특별단속 추진 계획을 발표한 이후 경찰청은 건설현장 노조 불법행위 집중 단속에 특진 50명을 배당했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건폭’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엄정하게 단속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전국의 건설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구속했다는 경찰의 실적 과시형 보도와 정부 당국과 여당의 혐오 정치가 쏟아내는 말들이 건설노동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며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리, 갈취, 공갈'이란 범죄적 표현과 '건폭'이라는 모욕적인 호명이 가리키는 것은 건설노조의 고용에 관한 단체교섭과 유급노조활동 권리 등 여느 노조에서나 볼 수 있는 단체협약상 권리였습니다. 폭압적인 수사는 건설노동조합과 건설노동자를 사회적인 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고 결국 한 건설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경찰은 고 양회동 건설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외면하고 오히려 건설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파괴하는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민주노총과 건설노조 집행부에 대해 수사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과 국민의힘, 정부, 대통령실은 집회 금지, 물대포를 운운하며 집회·시위의 권리를 침해하는 집회 대응과 집시법 개정안을 추진하겠다고 합니다. 건설노동자에 대한 공세는 권력에 저항하며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탄압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인권단체들은 건설노조에 대한 의도적인 기획 수사와 혐오의 정치는 건설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의 권리를 파괴하는 국가폭력이기에 이를 규탄합니다. 나아가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이들의 문제임을 밝힙니다.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맡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엮고, 안전한 노동환경,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노동조건, 존중받는 노동을 만들기 위해서 애쓴 건설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들의 권리이자 존엄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고 양회동 건설노동자의 마음을 기억하며 건설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인권활동가들의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발언문 1] 이세훈 건설노조 교육국장

안녕하세요. 저는 건설노조 교육국장 이세훈입니다.
방금 소개 드린 것처럼 저는 건설노조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 제가 부산지역에서 레미콘 간부들과 1박 2일간 교육을 했습니다. 레미콘 기사분들은 평균 연세가 많습니다. 이분들과 1박 2일 재미있게 교육을 했는데 그중에 한 프로그램에서 "건설노조 가입하고 나서 어떤 점이 가장 좋아졌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림으로 좋아진 점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이먹은 늙은이한테 무슨 그림이냐, 나 그림 못 그린다 막 항의하다가 그래도 한 번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겨우겨우 그림을 완성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60명 정도가 교육에 참여했는데 거의 절반정도가 비슷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뭔지 아시겠나요? 60여 명중 절반이 "건설노조를 하고 나서 가족과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60도 넘은 노인네 조합원들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습니다. 가족과 밥 먹는게 뭐라고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가족과 저녁을 먹는 것은 그냥 평범한 일상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잠자는 새벽에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해가지도록 일을 해야만 했던 우리는 가족과 저녁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내가 서울에 살아도 서울에서 일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오야지가 부산에 있는 일을 물어오면 내가 아무리 서울에 살아도 부산으로 일을 하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꾸로 부산에 있는 사람은 광주로 일하러가고 광주 있는 사람은 대전으로 일을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가족과 저녁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합원 중 한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자녀들 졸업사진에 우리 아버지는 없다고 말입니다. 가족과 먹고 살려고 일을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녀들의 입학식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겁니다. 가족과 저녁을 먹는 일, 자녀 입학식/졸업식에 참여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이런 당연한 일상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노가다라 불리는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건설노조 활동을 하면서 내 동네, 우리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내 집앞에 있는 건설현장에 고용을 요구하고 내 집앞의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니 일 끝나고 가족과 저녁을 먹게 되는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자녀 입학식/졸업식도 참여하고 주말이면 외식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구에겐 당연했던 일상이 우리는 건설노조 활동을 통해서 겨우 보통사람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장에서 일할때 이름이 없었습니다. 잘해야 아저씨, 여기죠, 저기요라고 불렸고, 그나마 기분나쁘면 이새끼 저새끼라고 불렸습니다. 건설기계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야 덤프, 굴삭기 저기로 가‘라고 하고, 레미콘이라고 차 넘버로 불렸습니다. 우리는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불릴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건설노조를 하고 나서 부터 드디어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구누구씨, 반장님, 팀장님, 드디어 존칭을 불릴 수 있게 됐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욕을 듣지 않게 됐습니다. 한명의 인간으로 불리우는 일이 바로 인권의 시작아니겠습니까?이런 모든 일은 건설노조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노조 활동을 하니까 임금도 오르고, 노동시간도 줄어서 좋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일하는 노동자라면 대한민국을 사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가족과 저녁을 먹는 일상, 가족과 외식을 하는 일상, 일하면서 욕을 듣지 않는 일상을 비로소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건설노조 간부들은 건설노조에 대한 애정이 깊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설노조를 통해 겨우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우리에게 공갈범, 갈취범이라고 몰아부치는 정권과 경찰/검찰에 우리는 분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건설노조 활동을 통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한명의 인간으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는데 건설노조 활동이 부인당하자 건설노조 조직을 부인당한 것을 넘어서 한명의 인간으로써 존엄성을 부인당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양회동 열사가 그랬습니다. 건설노조 공안탄압으로 1,029명이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건설노조는 조사를 받은 전체 조합원에게 트라우마 스크리닝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그중에 30%가 벌써 자살을 생각했봤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정권과 경찰과 검찰이 바로 우리 건설노동자의 존엄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요, 대통령이 국토부 장관이 경찰이 검찰이 우리 건설노조를 탄압한다면 탄압을 받아야 겠지요. 뭐 어쩔수 있겠습니까? 권한이 있는 자들이 탄압하겠다는데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힘없는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고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겁니다. 국민 개개인의 존엄성을 우습게 하는 정권은 그 말로가 비참할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조차 보호하지 않고 탄압하는 정권과 경찰과 검찰에 말하겠습니다. 그래요 탄압하고 싶으면 하세요. 우리는 버틸 겁니다. "다시는 노가다로 돌아가지 않겠다" 사람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했던 과거로 돌아 갈 것을 거부합니다. 이게 바로 열사의 뜻입니다. 그때까지 질기고 질기게 투쟁해서 결국은 건설노동자의 인간다운 권리를 더욱 확장시킬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끝)

[발언문 2]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입니다.
‘건설 현장’이라고 할 때 모두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임금체불, 장시간노동, 산업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건설현장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뀌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건설노조 탄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국토교통부, 경찰, 검찰 모두 그런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현장을 바꾸기 위해 애써온 건설노동자들이 2007년 건설노조를 만들고 더 큰 힘을 갖게 되어서야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건설노조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발주처와 시공사, 그리고 전문건설업체까지가 합법적인 도급 구조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불법적인 다단계하도급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하도급이 늘어날 때마다 당연히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줄어듭니다. 광주 학산빌딩 참사에서, 최초의 공사비가 단위면적당 28만원이었지만 다단계하도급으로 내려가는 동안 말단 도급에서는 공사비가 4만원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 다단계하도급 구조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하도급 업체들은 무리한 원가절감을 시도하게 되고, 무리한 공기단축, 안전비용 삭감, 임금체불 등이 심해집니다.
이런 다단계하도급 구조를 합법화한 것이 ‘시공참여자제도’였습니다. 2007년 설립된 건설노조는 ‘시공참여자제도’를 폐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문건설업체가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맥을 통해 팀장들이 다단계하도급으로 노동자들을 데리고 일하는 구조가 많습니다. 2022년 건설근로자공제회의 조사에 따르면 건설노동자의 채용이 인맥을 통해서라고 답한 비율이 67%입니다. 건설현장이 한시적이고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인맥을 통해 다단계하도급 구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노조가 전문건설업체와 고용에 대한 교섭을 하는 것은 불법비리의 온상인 다단계하도급 구조를 없애고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건설노조에서 고용교섭을 요구하게 된 것은 사용자측이 조합원에 대한 고용상 차별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노조의 고용교섭은 사용자측이 노조탄압의 일환으로 자행하는 조합원 고용차별에 대항하는 중요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건설기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설회사에 고용되어 있던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특수고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건설기계의 유지·운영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구조조정이었습니다.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시공사나 전문건설회사와 임대계약을 맺고 불안정하게 일해왔습니다. 고용이 불안정하니 무리한 작업지시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용에 대한 교섭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설현장에 노동조합 조합원이 들어가게 되면 현장이 달라집니다. 다단계 하도급이 줄어드니 임금체불이 줄어들고 노동시간이 지켜집니다. 위험한 작업도 줄어들게 됩니다.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임금인 임대단가가 낮아지지 않도록 적정한 요구안을 정하고 건설회사와의 교섭해왔습니다. 정부는 타워크레인 월례비를 불법이라고 문제삼고 있으나 월례비는 건설사들이 공사기간을 단축하려고 타워크레인 기사가 초과근무나 위험작업을 하도록 하려고 지급한 임금이었습니다. 오히려 건설노조가 나서서 이런 월례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위험작업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높이는 활동, 위험에 대한 관리, 출결관리, 작업에 대한 협업을 조직하면서 건설현장을 더 좋게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건설노동자들의 고용교섭을 ‘채용비리’라고 하고, 건설기계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며 노조의 요구와 투쟁을 ‘사업자들의 담합’이라고 주장합니다.
특수고용 노동자는 노동자이며 당연히 노동조합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미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20년간 노조활동을 해왔습니다. 또한 노동조합이라면 당연히 고용에 대한 교섭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용교섭을 불법으로 모든 것은 노동조합의 교섭 범위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행위입니다.
정부는 건설사들의 사주를 받아 비리와 산재, 불법으로 얼룩진 건설현장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건설노조가 애를 써서 바꿔놓은 현장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건설현장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정부에 맞서는 건설노동자들의 자긍심을 응원하며 연대할 것입니다. (끝)

[발언문 3]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언론보도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규정해야할 게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의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화물연대’부터 이번 ‘건설노조’에 이르기까지 노조를 때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지지율을 끌어 올리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같은 방식이 어느 정도 유효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조 때리기는 왜 먹힐까, 그것은 아마도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노동혐오와 저널리즘의 기능 실종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조를 두고 ‘건폭’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여론몰이에 나섰을 때, 언론의 행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생각이 다르지 않으니, 쉽게 따라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에 집회·시위 자유에 대한 낮은 인식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정치인이 ‘건폭’이라고 하면 언론도 ‘건폭’이라고 써야 하는 걸까. 그러면 안 됩니다. 윤석열 정부가 ‘건폭’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언론이 아무런 비판없이 그 용어를 그대로 쓴다면, 그것이야 말로 권력자의 의도에 휘말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건폭’이란 용어 자체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건설노동자를 조폭에 비유한 말로, 누구에게도 쉽게 붙여선 안 되는 말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건설 노동자들이 ‘건폭’이라는 말을 들어야할 만큼 불법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지 따져봤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건폭’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언론사 내부적으로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언론의 현실입니다.
이번 건설노동자 싸움과 관련해서는 조선일보 보도 행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건폭’ 프레임을 어느 언론사보다 앞장서 제기한 매체입니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자회사 조선NS는 양회동 열사의 분신과 관련해 ‘방조혐의’를 덧씌우기 위한 기사를 작성해 논란을 빚었습니다. 조선NS가 제시한 근거는 터무니없었습니다. 양회동 열사에 근접해 있던 목격자들의 증언은 배척해버렸고 그 대신 ‘익명의 목격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CCTV 화면을 입맛대로 해석하면서도 실제 화면 속 인물들을 직접 취재하지는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조선일보가 ‘진실’을 쫓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우선순위에 두고 기사를 섰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개탄스러운 건, 이런 조선NS의 혐오보도가 조선일보의 수익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횡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의 또 다른 자회사 월간조선은 곧바로 다음 날 양회동 열사의 유서 필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정도면, 조선일보에 ‘언론’의 기준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언론이 답을 해야 할 때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건폭’이 사라지면 건설현장이 나아질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그렇습니까? 건설현장의 특수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물론, 건설현장에 폭력배들이 유입돼 있을 수 있고, 정부가 이야기하는 공갈·협박이 있었을 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사실만을 부각해 대서특필하는 게 저널리즘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론매체 그리고 기자들은 ‘기사는 팩트를 기반으로 쓰였다’, ‘사실이지 않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답을 드리겠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만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낮은 수준의 저널리즘’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언론보도가 혐오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이 놓여 있는 토대’입니다. 언론은 보도가 가져올 효과까지도 고려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언론이 혐오정치의 본질을 외면하고 혐오정서에 편승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한 노동자를 사망이었습니다. 언론이 진정 직시해야할 것은 ‘건폭’이 아니라, ‘노동혐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끝)

[발언문 4]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먹고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억울하고 창피합니다.”
故양희동 열사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일을 열심히 했을뿐인데 그로 인해 영장심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앞에 그는 ’억울함과 창피함‘을 느꼈습니다. 양희동 열사는 존엄이 훼손되었다 느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상 업무를 하는 이들의 활동을 샅샅이 뒤지려들고 구속까지 하려 들었습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조각내려 드는 이 잔인한 행태에 존엄이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같은 낙인찍기, 모욕주기 행태는 윤석열 정부 들어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전장연을 시민을 볼모잡는다 낙인찍고, 휠체어 접근성조차 보장되지 않는 경찰서로의 출석통보를 불응하자 체포했습니다. 서울광장을 사용하겠다는 퀴어문화축제측을 그간 문란한 행위들이 있었다며 낙인찍고 광장사용을 불허하였습니다. 정부가 이토록 당당하게 혐오에 앞장서니 언론들도 너도나도 그 이야기를 받아씁니다. 노동자의 집회도 불법, 파업도 불법. 장애인이 지하철 타는 것도 불법, 성소수자가 사랑하는 것도 불법, 동성 배우자와 혼인신고도 불법.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장애인은, 성소수자는, 숨만 쉬어도 불법이랍니다.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노동3권을 보장받을 권리, 원하는 사람과 사랑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 같은 것은 이 나라에서 무용지물입니다.
모욕주기 행태는 노조활동을 위축시키고 낙인찍기는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원들을 고립시키려는 행태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불법이라 매도당하며 우리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는 모든 시민들이 권리와 연대를 박살내려는 행태에 굴하지 않고 건설노조와 함께 노동할 권리, 노조할 권리, 일상을 평범하게 지켜갈 권리를 향한 투쟁에 함께 하겠습니다.
차별은 합법이고 평등은 불법인 이 나라에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도 평등을 향한 불법투쟁들에 함께 하며 싸우겠습니다. 투쟁. (끝)

[발언문 5] 이호영 공권력감시대응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헌법에서 이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조항은 바로 제21조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헌법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로 구분하여 표현의 자유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언론·출판의 자유는 평범한 시민들은 쉽게 누리기 어려운 권리라는 특징을 갖는다. 언론에 보도되는 대부분의 주장들은 정치인, 기업인,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 상당수이고, 우리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소리는 잘 실리지 않는다. 출판의 자유 역시 글빨 있는 지식인의 것에 더 가깝다.
하지만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그렇지 않다. 집회는 힘, 권력,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든다. 결사는 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주장에 더 힘을 실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집회·결사는 평범한 일반시민에게 더 가까운 표현의 수단이 된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평범한 일반 시민,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입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권리이자, 논의의 광장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민주주의의 핵심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대통령실 등은 건설노조를 ‘건폭’이라 부르며 마치 범죄집단인양 몰아세웠다. 혐오대상으로 만들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운영할 건설노동자의 권리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분노로 양희동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은 외면한 채, 죽은 이를 추모하고 정부를 규탄하기 위해 모인 집회에 대해 윤희근 경찰청장은 법률적 근거도 없이 제한하려 시도하고 결국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여당은 200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13년동안 별다른 문제없이 이루어지던 야간집회를 전면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물대포 재도입을 운운하며 집회·시위에 대한 권리를 더욱더 제한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혐오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잘 알고 있다. 대선 기간 중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 하고,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동권 보장이라는 정당한 주장을 하는 장애인을 시민들과 구분하고, 오랜 기간 서울광장에서 열리던 퀴어축제를 불허하며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을 또다른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저급한 혐오정치의 대상이 건설노조로 대표되는 노동자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끝나면 새로운 대상을 찾을 것임이 명약관화하다.
마르틴 니묄러라는 독일의 목사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그들(나치가)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는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시도가 또다른 누군가에 대한 배제로 이어질 수 있고, 결국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징조가 됨을 보여주었다. 집회와 시위가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주된 표현수단이며, 그 권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은 혐오정치와 결합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사회에서 지워버리고, 사회적 약자와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만들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결국 모든 권리를 훼손하며 인간의 존엄을 파괴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를 막아내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다. 건설노동자가 가지는 노동의 권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권을 위해,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건설노동자 고 양회동 열사를 기억하고, 건설노동자와 더욱 공고히 연대할 것이다.
2023-05-23 15:25:31
121.128.65.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