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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진술서
icon 관리자
icon 2002-05-10 12:58:36  |   icon 조회: 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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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진술서

1995년 6월 12일 오전 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와 생을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저만 동그마니 남게된 것입니다. 믿고 의지하며, 친구 같이 생각을 공유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한 공간에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진 것입니다.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입니다. 나의 아기 화영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웃는 모습, 기우뚱거리며 몇 발자국 걷는 모습, 안고 있으면 저의 옷자락의 단추를 만지던 귀여운 손, 잠시 안고 있으면 꾸벅꾸벅 졸던 모습, 무엇이든 손에 닫는 것은 입으로 가져가던 어렸을 때의 순간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왼쪽 가슴이 저려 옵니다. 숨을 크게 쉬어 봅니다. 크게 들이킬수록 더 아려 옵니다.

재판도 참 오랫동안 받아 오고 있습니다. 사형 무죄 파기환송, 햇수로는 7년이 됩니다. 참 여러 가지 마음들이 제 안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했습니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재판은 계속 받아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한'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이 '한'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한 식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함께 잠을 자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이 걸어다닙니다. 죽어야 떨어져 나갈지...

누구 때문에 생겼으며 누구에게 풀어내야 하는지조차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죽어서 말을 못할 것이라고 항변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처럼 있을 것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죽은 사람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막을 힘도 없었고 저조차 죽음의 구렁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막힘은 누가 풀어야 합니까?

새로 태어났을 화영이의 동생, 또 이제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화영이의 귀여운 모습도 없는 이 세상에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다 우울해 집니다. 크게 보자 넓게 보자 하면서도 다른 아이들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소리치면서도 마음이 착 가라앉아 옴은 어찌할 수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화영이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가끔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저를 원망하고 범인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대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난 직후 이제는 나의 장모가 아니다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라고 스스로 다짐도 했었지만 한때 모자처럼 맺은 정이 모질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분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드렸는지, 이분을 미워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참 어려운 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나에게도 편하다는 것은 옛날부터 알고 있는 일이지만 원수같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사람들을 축복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살기 위해 제가 평화를 얻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 봅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마음을 돌이키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기도해 봅니다.

마지막 유언 같은 느낌이 들어 그 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 때문에 마음을 상하시어 혹시 아직 저를 용서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용서를 청합니다.

2001. 1. 29. 이 도행
2002-05-10 12: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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