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는 지금 세계적으로 냉정 시대가 마감되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분단의 땅 한반도에도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남북한은 북미 핵협상 타결 등 새롭게 변화된 조건에 부응해 통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혈육을 만날 날만을 기다려 온 이산 가족들은 다시금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대 분단의 또 다른 희생양들은 여전히 차디찬 감옥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간첩 행위를 하고 처벌을 받은 간첩일지라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분단의 피해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반목과 대립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일생을 보내고 있을 것이며 그들 또한 언젠가 통일이 되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간첩행위를 한사실이 없는데도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당한 뒤 통한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늘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신귀영씨 일가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장도 없이 강제 연행되어 수십일씩 밀실에 감금된 채 온갖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신춘석씨의 경우 아직도 선명한 십수년전의 고문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으며 1980녀 당시 공소장에 기재된 혐의 내용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천주교인권위원회 변호사들의 조사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핵심 인물인 신수영이 조총련 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일본 지바시장이 발행한 등록 증명서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신수영은, 자신은 조총련 간부도 아니었으며 서성칠, 신춘석과 만난 사실도 없고 신귀영에게 간첩 행위를 지령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공증을 받아 진술하였고 언제든지 재판정에 출두해 증언하겠다고 약속했다 합니다.
또한 서성칠이 간첩 행위를 하기 위해 조선지도, 부산 시설지도등을 구입했다는 부산 근학 서점은 지도를 구입한 것으로 되어있는 1972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이 서점은 1975년 1월에야 개업했다는 사실이 중부산 세무서장의 사실조회 신청에 대한 회신에 의해 증명되었고 합니다. 이것들은 사건 조작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는 신귀영, 신춘석씨등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습니다. 1980년 당시의 재판에서는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였느데 지금에 와서 그 당시 고문에 의해 자백했던 내용들이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가지 객관적 증거를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귀영씨 일가 사건은 충분히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귀영씨등이 무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는 것이지 우리들이 주장한다고 확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아주 소박합니다.
충분한 재심 사유가 갖춰진 이상 이들이 다시 한번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린당하고 평화롭던 가정마저 파괴당한 채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이 다시금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재판장님의 현명하신 판단을 기대하오며 귀 재판부에 주님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 부산교구 이갑수 주교 제주교구 김창렬 주교
전주교구 이병호 주교 안동교구 박석희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