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여럽명의 진실
icon 천주교인권위원회
icon 2008-09-29 15:23:04  |   icon 조회: 7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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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 산 자들이 함께 춤추는 날이



문정현(신부, 인혁당 대책위 대표)


인혁당! 1975년 4월 9일 이른 아침에 청천 벼락이 떨어졌다.

어제 10시에 대법원 판결이 나고, 저녁에 명동성당에서 대단히 큰 시국 기도회가 있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늦은 밤에 응암동 성당 함세웅 신부 사제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꼭두새벽에 가족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사형 집행 소식이다. 소식을 듣고 서울 구치소(서대문)로 달려갔다. 전투경찰로 삼엄했다. 가족들의 절규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이후, 우리는 가족들의 고통을 헤아려 보지 못했다.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늘이 무너지지 않고 땅이 꺼지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 왔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투옥되었던가?

이른바 인혁당 가족을 대면하면 빚을 진 것만 같다. 죄책감마저 든다.
우리가 죽인 것만 같다.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지금도 당시 안기부 사람에게 "너는 여러 사람을 죽였다. 너는 그들을 살려내라." 찌르는 듯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 사람들은 당황하며 "법대로 하세요!"라고 힘없는 대답을 하고 도망치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복권이 되지 않았습니까?", "생활하시기 어려우시지요?", "인혁당 사건의 진상과 명예회복 문제는 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렇다. 죽은 이들은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뜨고 절규하고 있다. 이들의 한이 풀리지 않고는 이 땅의 평화도 없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 진실에 승복하여 모두가 살아나야 한다.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는 인혁당 사건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일이 이제야 시작되나 보다.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 위원회(인혁당 대책위)가 떴다.

불의한 독재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 당한 이들이 나라와 민족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는 때가 이제야 오는가 보다. 강산이 두번 바뀌고 한 세대가 흘러가고 있지 않는가? 저들의 뼈들이 일어나 춤출 날이 왔다.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모여 함께 춤출 날을 만들자.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여덟명의 진실



1975년 4월 9일 이날은 국제 법학자협회에 의해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된 날이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조작된 도예종씨 등 8명이 유신정권의 철저한 조작으로 사법살해된 날이다.


정권연장을 위해 필요했던 희생양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권 18년간의 여러 인권유린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이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야기된 6.3 사태의 과정에서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잠재우고,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통해 대구지역인사들을 도예종씨를 당수로 하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발표한다.

그러나 1차 인혁당 사건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통한 조작이 밝혀지고, 아무 증거도 없이 조작된 사건의 기소를 이용훈 부장검사 등 3명의 담당 검사가 거부하면서 이들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게 되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법파동 끝에 당시 중정의 대대적인 발표와 달리 도씨 등 몇명만이 인혁당과는 무관한 과거의 사상적 경향을 이유로 실형을 받고 사건은 일단락된다.


10년만에 다시 써먹은 인혁당 사건
중정의 사건 조작이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이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차 인혁당 사건 발생후 10년이 지난 74년의 일이다.

유신에 항거하기 위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가열되고 조직화되자 위기를 느낀 정권은 또다시 '조작'의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정권은 분단 상황에서 국민들이 레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며 이철, 유인태 등의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으로 역어 사형선고까지 내리면서 이들 학생의 배후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 지하조직이라며 10년전 사건 조작에 실패했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체포,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다고 사건을 발표한다.

바로 2차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이수병씨 등 총 23명이 구속된 이 사건 관련자들은 74년 5월 27일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기소되어 6월 15일 비상 보통 군법회의 1심 재판을 시작으로 10개월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게 된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이 사건의 주요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고, 놀랍게도 판결이 난 그날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된다. 공안관련사범이라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 4 년은 그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 극히 이례적인 이날의 사형집행은 조작의 전모가 밝혀지길 두려워한 박정희와 중정에 의한 폭거였고, 우리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비극이 되고 말았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인혁당 사건은 중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다. 인혁당이라는 이름도 중정의 작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담당 검사였던 정원찬씨도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족의 접견이나 변호인의 제대로 된 조력도 받지 못한 채 정권안보에 혈안이 된 독재집단에 의해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숨죽여 살아온 지 23년이 되었다. 문민정부마저도 희생자들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추모비마저 허용하지 않아서, 경북대에 세워진 추모비는 때마다 경찰이 동원한 포클레인의 표적이 되었다.

7,80년대 한국 역사에 있어 광주학살과 더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지 23년이 되었는데도, 가장 초보적인 진상규명도 되지 않았다. 이는 살아있는 자들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하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하고, 제 2의 건국을 해야 한다는 소리도 새롭다. 그렇지만, 독재정권에 의한 피의 역사, 그리고 20년이 지나도록 이를 올바로 세우지 못했던 우리의 무관심과 냉대를 그냥 두고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조국의 모습이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혁당 8명의 진실이 밝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8년 11월

인혁당사건 진상구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2008-09-29 15: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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