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유치장 브래지어 탈의 사건 국가배상청구소송 제기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1-08-10 15:51:40  |   icon 조회: 10493
[보도자료]
유치장 브래지어 탈의 사건 국가배상청구소송 제기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2008년 유치장 수용 과정에서 브래지어 탈의를 강요받았던 여성 4명이 2011년 8월 10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각 600만원씩 모두 2400만원의 위자료를 청구했습니다.

3. 피해자들은 2008년 8월 15일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집시법 위반 및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현행범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용되었습니다. 신체검사 직후 경찰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규정상 브래지어를 벗어야 한다고 강요했고 당황한 피해자들은 길게는 체포시한인 48시간 가까이 브래지어를 벗은 채 유치장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다수의 피해자들은 여성 경찰이 유치장 내 탈의실 밖에서 근처에 있던 남성 경찰이나 남성 유치인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브래지어 탈의를 요구하여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얇은 티셔츠를 입고 물대포를 맞아 완전히 젖었는데도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 조사에 응해야 했습니다. 어떤 피해자는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얇은 고무줄까지 압수당해야 했고 신체검사 과정에서 여성 경찰관이 반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어 팬티를 더듬는 방식으로 검사를 하여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소장에서 “어쩔 수 없이 공공연하게 브래지어를 벗는 경험을 하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성적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꼈고 이를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밝혔습니다.

4. 경찰은 브래지어가 자살도구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구치소 등 구금시설에서 브래지어 탈의를 강요한 경우는 없었고, 2003년 이후 국내 구치소·교도소는 물론이고 유치장에서도 브래지어를 이용해 자살을 하거나 타인을 위해한 사례가 한 건도 없었던 점을 볼 때, 경찰의 설명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또한 피해자들은 경미한 범죄로 연행된 사람들로 자살이나 자해의 동기나 가능성이 애초에 없었으므로 경찰의 브래지어 탈의 강요는 자살 방지라는 제도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행해진 매우 이례적인 조치로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입니다. 게다가 피해자 중 한 사람이 면회 과정에서 브래지어 탈의 사실을 외부로 알리면서 동료들이 이를 항의하자 경찰은 하루 만에 브래지어를 돌려주고 새 브래지어의 반입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경찰은 조직 내부에서조차도 합리적인 기준을 갖추지 못한 채 자의적으로 공권력을 남용하여 행사했던 것입니다.

5. 경찰청 훈령인 ‘피의자 유치 및 호송규칙’은 유치인의 생명 신체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해 “혁대, 넥타이, 금속물 기타 자살에 공용될 우려가 있는 물건”(제9조 제1항)을 경찰이 보관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위 호송규칙에 대해서 “경찰청장이 관련 행정기관 및 그 직원에 대하여 그 직무권한행사의 지침을 발한 행정조직 내부에 있어서의 행정명령의 성질을 가지는 것에 불과하고 법규명령의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에 따른 처분이라고 하여 당연히 적법한 처분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01. 10. 26. 선고 2001다51466 판결). 이 사건은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의하지 않고 내부 규칙에 불과한 훈령으로 기본권을 제한했음은 물론, 경찰이 재량권을 남용하여 자의적으로 호송규칙을 확대 해석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위법한 직무행위이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공권력 행사인 것입니다.

6. 2008년 당시 이 사건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경찰청은 2009년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브래지어의 위험성 유무에 대한 검증을 거쳐 착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판정을 받아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고 답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6월에도 반값등록금 시위를 하다가 연행된 대학생이 서울 광진경찰서에서 유사한 피해를 입음으로써 경찰의 답변이 거짓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이번 소송을 통해 경찰의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가 근절되어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7. 이 소송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지금까지 조작간첩 재심사건, 군의문사 사건 등 10여 건의 사건을 공익소송사건으로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8.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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