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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군의문사 故이종환 이병 24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2-10-31 12:52:35  |   icon 조회: 9437
[보도자료]
군의문사 故이종환 이병 24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
서울행정법원, “가혹행위와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1988년 육군 이병으로 복무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故이종환 이병이 24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지난 2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5단독 김순열 판사는 서울지방보훈청장의 국가유공자등록거부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별첨1: 판결문) 고인은 경기도 파주시 소재 제28사단에서 복무하다가 외박 중 동두천시 소재 여인숙의 목욕탕 쇠파이프에 전투화 끈으로 목을 매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별첨2: 이종환 이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3. 서울행정법원은 “망인이 군 입대 전에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고 망인의 가족 중에서도 그와 같은 병력이 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는 점, 가족관계나 이성관계 등 사적인 생활영역에서 특별한 문제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망인이 군에 입대한 후 3개월이 경과하기도 전에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하였는바, 그 과정에 군 복무 이외의 다른 사정이 개입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망인은 암기를 잘 못하고 행동이 느려 군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한 구타 등 가혹행위로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특히 자살 직전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100km 행군과 유격훈련을 하면서 그 정신적 스트레스는 망인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점, 일반 사회와는 달리 엄격한 규율과 집단행동이 중시되는 군대 사회의 통제성과 폐쇄성으로 인하여 상급자의 구타 등 가혹행위와 그로 인한 피해는 일반 사회에서의 그것보다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선임병들의 거듭된 가혹행위와 망인이 감당하기 힘든 훈련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군대 생활에의 부적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망인의 자살에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망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4. 2009년까지 운영된 대통령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망인과 같이 신병교육대에서 신병훈련을 받은 훈련병들은 훈련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군화발로 종아리를 걷어차이거나 분대별로 ‘멍석말이’, 선착순, 목봉체조 등을 하였고 개인별로 머리박기, 총잡고 엎드려뻗쳐 등의 얼차려를 당했습니다. 내무반장들은 거의 매일 저녁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신병들에게 ‘관물대 위에 발을 올린 상태에서 깍지를 끼고 엎드려뻗쳐’, ‘침상에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걷어차서 차례로 쓰러뜨리기’ 등의 얼차려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망인이 속한 1소대 내무반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성적인 사조직이 있었는데 상병 계급의 병사들이 식기당번이라 하여 군기를 담당하는 군기조 역할을 했고, 일병 계급의 병사들은 침상조라 하여 이등병들의 군기를 담당했습니다. 지적사항이 있으면 군기조가 간부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세면장 등에 후임 병사 모두를 집합시켜 “군기가 빠졌다”고 질책하며 ‘관물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엎드려뻗쳐’, ‘반합뚜껑, 치약뚜껑, 총구, 철모, 군번줄을 감은 인식표 등에 머리박기’,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 ‘단체로 옆의 병사와 손을 맞잡고 깍지를 낀 후 집단적으로 구호에 맞추어 푸쉬업하기’ 등의 얼차려를 빙자한 가혹행위를 10~20여 분간 실시했습니다. 또한 철모를 쓴 후임 머리를 철모로 때리기, 군화발로 종아리를 걷어차기,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기 등의 폭행을 하기도 했으며 침상조는 군기조의 지시를 받아 별도로 이등병들을 집합시켜 얼차려나 폭행 등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망인의 숙부가 면회를 했을 때 “군 생활이 뭐가 힘드냐?”고 묻자 망인은 “선임들이 너무 때려서 도저히 못 참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한편, 소대장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얼굴, 가슴 등을 닥치는 대로 구타했고 군화발로 이곳저곳을 걷어차기도 했습니다. 군의문사위 조사에 응한 한 병사는 소대장이 소대원들을 너무 괴롭히니까 한번은 중대장이 소대장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소대장이 내무반에 쓰러진 적도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대대장도 “군대는 구타가 필요악이다”라며 구타를 조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5. 군의문사위로부터 자문의뢰를 받은 정신과 전문의는 “군 복무 당시 망인은 극도의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고통은 정신의학적으로 ‘불안과 우울 기분이 동반된 적응장애’ 또는 ‘주요 우울장애’를 진단 내려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6. 그동안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순직군경’으로 예우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죽음의 경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자살로 처리된 채 같은 법 제4조 6항의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당해 왔습니다. 대법원은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이라며 사망 이전에 정신과 진단을 받은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인 사건만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왔습니다.
다행히 2011년 9월 국가유공자법 개정에 따라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가 삭제되어 올해 7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대법원도 지난 6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데도 그 사망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존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7. 우리 위원회는 이번 판결을 통해 죽음의 진실 규명과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해 온 유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군 복무 중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방부는 비인간적인 군 복무 환경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군 복무 환경을 개선하고, 유가족들이 법원에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사망 사건의 조사와 국가유공자 심의 과정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8. 이 소송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1: 판결문(별도 파일)

※별첨2: 이종환 이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 1968년 : 출생
■ 1988년 5월 17일 : 306 보충대 입대
■ 1988년 5월 21일 : 제28사단 신병교육대 입소
■ 1988년 7월 6일 : 경기도 파주시 소재 제28사단 80연대 2대대 6중대 배치
■ 1988년 8월 12일 : 100km 행군 및 유격훈련 후 복귀
■ 1988년 8월 13일 : 망인의 동생, 숙부, 할머니 등 면회
■ 1988년 8월 15일 : 외박 나온 경기도 동두천시 소재 여인숙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
■ 1988년 8월 16일 : 부검 후 서울시립장재장에서 화장, 한강 상류에서 산골
■ 2007년 1월 2일 : 유가족,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
■ 2009년 6월 17일 : 군의문사위, 진상규명 결정
“망 이종환은 구타 등 가혹행위, 자신의 신체적 조건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훈련, 지휘관의 관리소흘 등이 원인이 되어 주요 우울증이 발병,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
■ 2010년 4월 2일 : 유가족,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공익소송 진행 요청
■ 2010년 4월 14일 : 천주교인권위원회 공익소송소위원회, 공익소송으로 진행하기로 의결
(담당 김서현 변호사)
■ 2010년 8월 5일 : 유가족, 서울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 신청
■ 2010년 10월 15일 : 서울지방보훈청, 국가유공자 등록 거부 처분
“육군본부에서 당초 자살로 결론지은 기 심의가 그대로 유효한 점, 사망 시기와 장소가 외박 중 영외인 점, 사망 전 우울증 등의 진단 기록이 없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볼 때, 사망원인이 공무와의 상당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
■ 2011년 1월 12일 : 유가족, 행정심판 제기
■ 2011년 4월 19일 : 중앙행정심판위, 청구 기각 결정
“고인의 사망전 우울증 등 정신과 진료 기록이 없는 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고인에 대한 사망구분 재심의를 국방부장관에게 요청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국방부로 재심의 요청한 본 사건에 대한 사망구분 재심의 결과 조회에서 ‘유족으로부터 재심의 중지요청이 접수되어 사망구분 재심의를 불회부’하여 최초 ‘자살’로 결정된 기 심의가 그대로 유효한 점, 고인의 사망에 대한 국가배상책임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고인의 사망과 군 공무수행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 2011년 7월 29일 : 유가족, 행정소송 제기
■ 2012년 10월 25일 : 서울행정법원 행정5단독(김순열 판사), 원고 승소 판결
※별첨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2012-10-31 12:52:35
222.111.2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