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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대법원, 군 의문사 故박혜종 상병 국가유공자 인정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3-01-15 11:26:32  |   icon 조회: 9110
[보도자료]
대법원, 군 의문사 故박혜종 상병 국가유공자 인정
가혹행위와 부당한 징계처벌이 사망 원인…15년 만에 명예회복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해병대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故박혜종 상병이 15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지난 10일 대법원 제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고인의 유가족이 서울지방보훈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비해당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고인은 1998년 3월 16일 아침 중대 보급창고 앞에서 선임병의 K-2 소총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별첨1: 故박혜종 상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3. 지난해 8월 서울고등법원 제10행정부(재판장 강민구)는 △망인은 소속 중대장으로부터 부대원들과 함께 심한 가혹행위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망인만 별도로 문제사병으로 관리를 당하면서 사망 이전 수일에 걸쳐 집중적인 가혹행위를 당한 점 △망인은 소속 중대로 전입한 이후 선임병과의 갈등관계와 부대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관계가 약 3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상당한 긴장내지 중압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망인은 중대장으로부터 징계사유를 제대로 통보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비위사실에 비하여 과중한 15일간의 영창처분을 받게 됨으로 인하여 좌절감을 가짐과 동시에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야간에 장시간 상황실에 꿇어앉아 있으면서 모멸감까지 느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망인이 자살을 결심한 이후 부대 내의 총기와 탄약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총기를 절취하게 되어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 점 △망인이 입영 신체검사 당시 신장 170cm, 체중 60kg으로 신체등위 1등급을 받을 정도의 건강한 신체조건을 지니고 정신적인 이상상태도 없었던 점 △망인이 입대하기 전에 정신질환을 앓은 병력이 있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망인의 가족 중에서도 그와 같은 병력이 있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는 점 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재판부는 “지휘관의 심한 가혹행위와 부당한 징계처벌, 부대의 총기와 탄약 관리의 소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망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며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망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4. 2009년까지 운영된 대통령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망인의 중대장이 △병사들을 내무실 앞 맨홀 뚜껑을 열어 팬티차림으로 물속에 들어가게 하여 잠수를 시키고 누군가 나오려고 하면 머리를 밟는 속칭 ‘뚜껑 얼차려’를 하게하고 △잠을 재우지 않고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영하의 날씨에 팬티 차림으로 PT체조를 시키고 △일주일 정도 잠을 안 재우면서 상황실에 무릎을 꿇고 반성을 하도록 하는 등 가혹행위가 군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만연했습니다. 망인은 사망 이틀 전 포상 근무 중 졸다가 중대장에게 적발되어 영창 15일의 징계를 받아 2박 3일간 상황실에서 무릎을 꿇고 대기해야 했고 사망 당일 새벽 1시경 입창 서류에 지장을 찍었습니다.

5. 그동안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순직군경’으로 예우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죽음의 경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자살로 처리된 채 같은 법 제4조 6항의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당해 왔습니다. 대법원은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이라며 사망 이전에 정신과 진단을 받은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인 사건만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왔습니다.
다행히 2011년 9월 국가유공자법 개정에 따라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가 삭제되어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대법원도 지난해 6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데도 그 사망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존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6. 우리 위원회는 이번 판결을 통해 죽음의 진실 규명과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해 온 유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군 복무 중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방부는 비인간적인 군 복무 환경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복무 환경을 개선하고, 유가족들이 법원에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사망 사건의 조사와 국가유공자 심의 과정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7. 이 소송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2 :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1 : 故박혜종 상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 1977년 : 출생
■ 1996년 11월 6일 : 해병 793기로 입대
■ 1998년 3월 16일 : 사망
■ 1999년 3월 30일 : 유가족, 해군 민원제기 사망사고 조사단에 재조사 요청
■ 1999년 8월 : 국방부조사본부 사망사고민원조사단, 자살로 결론
■ 2000년 5월 1일 : 유가족, 대구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 신청
■ 2000년 7월 11일 : 보훈심사위원회, 순직군경 요건 비해당자 의결
■ 2000년 8월 10일 : 유가족, 대구지방보훈청을 상대로 행정소송 제기

■ 2001년 5월 17일 : 대구지방법원, 원고 승소 판결
“중대장이 평소 심한 가혹행위를 해왔고, 총기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음에도 이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자존심이 매우 강한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인 망인으로 하여금 결국 정신적으로 절망 상태에서 총기를 절취하여 자살하게 하였다고 추단할 수 있는 바, 망인의 자살은 업무상 입은 가혹행위 등과 상당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고,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자해행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서 저질러진 것”

■ 2001년 11월 30일 : 대구고등법원, 원고 패소 판결
“망인의 자살은 나약한 성격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법시행령 제3조의2 단서 제1호의 불가피한 사유 없는 본인의 고의에 의한 사망 또는 제4호의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에 해당한다”

■ 2003년 9월 5일 : 대법원, 상고 기각 판결
■ 2006년 12월 12일 : 유가족, 군의문사위에 진정
■ 2007년 11월 21일 : 군의문사위, 조사개시 결정
■ 2009년 7월 15일 : 군의문사위, 진상규명 결정
“망인은 군복무 중 문제병사라는 낙인 하에 타대원에 비하여 중대장으로부터 심한 가혹행위를 받아 왔으며, 지휘관의 잘못된 지휘방식과 과중한 징계 처벌·관리감독의 소홀이 직접적으로 중요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인정”

■ 2010년 4월 6일 : 유가족, 서울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 신청
■ 2010년 10월 15일 : 서울지방보훈청, 국가유공자유족등록 거부 처분
■ 2010년 11월 2일 : 유가족, 행정심판 청구
■ 2011년 3월 29일 :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청구 기각
■ 2011년 4월 8일 : 유가족,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공익소송 요청
■ 2011년 4월 11일 : 천주교인권위원회 공익소송소위원회, 공익소송으로 진행하기로 의결
(담당 김현성 변호사)
■ 2011년 7월 1일 : 유가족, 서울지방보훈청을 상대로 행정소송 제기
■ 2011년 12월 15일 : 서울행정법원, 원고 패소 판결
“중대장이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서 우월감과 자존심이 강하여 군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던 망인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여 군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러한 부적응상태로 인하여 유발되는 문제점들을 이유로 가혹행위에 가까울 정도의 군기교육을 가하고, 또 징계사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아니하여 망인으로 하여금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15일간이나 되는 장기간의 징계영창에 처하게 함으로써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한 것이 이 사건 자살의 한 원인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군기교육은 군 조직을 유지, 통솔하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느 부대에나 있고, 더욱이 해병대는 군기가 엄하기로 소문난 부대인 점, … 다른 중대원들은 이를 잘 이겨낸 것으로 보아 그 군기교육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 등을 고려하면, 망인의 자살은 나약한 성격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국가유공자법 제4조 제6항 제4호의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므로…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 2012년 8월 31일 : 서울고등법원, 원고 승소 판결
“지휘관의 심한 가혹행위와 부당한 징계처벌, 부대의 총기와 탄약 관리의 소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망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망인의 자살로 인한 사망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

■ 2013년 1월 10일 : 대법원, 상고 기각 판결(심리불속행) (원고승소 확정)

※별첨2 :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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