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대법원, 군의문사 故주00 이병 국가유공자 인정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3-05-13 00:32:14  |   icon 조회: 8092
[보도자료]
대법원, 군의문사 故주00 이병 국가유공자 인정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12년 만에 명예회복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2001년 육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故주00 이병이 12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지난 9일 대법원은 고인의 유가족이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비해당결정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심리불속행 기각)하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고인은 2001년 3월 6일 아침 해안선 야간경계근무를 마치고 부대원 5인과 함께 부대로 복귀 중 바다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3. 지난해 12월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제1행정부(재판장 고의영)는 “망인이 군대에 입대하여 직무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받은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으로 인하여 우울증이 발병·악화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망인의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한 바 있습니다.

4. 2009년 대통령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도 “망인은 열악한 소초 및 근무환경, 소초장의 질책과 선임병들의 암기강요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주요 우울증이 발현되고, 소초장 및 선임병들의 적절한 관리 부족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군의문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망인이 근무했던 소초는 고지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시설이 낙후되어 화장실이나 샤워실 사용이 불편했으며, 내무실이 비좁아 40명 이상이 자기에는 좁은 환경이었고, 위치상 부식차가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오침 시간에 자주 일어나 부식을 운반해야 하는 등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또한 “(선임병이 다른 후임병을) 대검으로 위협도 하고, 총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때리기도 하고 야삽으로 때리기도 하고 주먹이나 발로 온 몸을 때렸다”는 동료 병사들의 증언이 나올 정도로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해 있었다고 합니다.

5. 그동안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순직군경’으로 예우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죽음의 경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자살로 처리된 채 같은 법 제4조 6항의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당해 왔습니다. 대법원은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이라며 사망 이전에 정신과 진단을 받은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인 사건만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왔습니다. 다행히 2011년 9월 국가유공자법 개정에 따라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가 삭제되었습니다. 대법원도 2012년 6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데도 그 사망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존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6. 우리 위원회는 이번 판결을 통해 죽음의 진실 규명과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해 온 유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군 복무 중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부는 비인간적인 군 복무 환경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군 복무 환경을 개선하고, 유가족들이 법원에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사망 사건의 조사와 국가유공자 심의 과정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7. 이 소송은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8.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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