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수형자 변호사 접견권 헌법소원 제기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3-08-08 14:03:09  |   icon 조회: 8676
[보도자료]
수형자 변호사 접견권 헌법소원 제기
“수형자에게도 미결수용자 변호인 접견과 동일한 접견 허용해야”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8일 교도소·구치소에 수용된 수형자(기결수용자)에게도 미결수용자와 동일하게 변호사 접견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재 미결수용자의 경우 접촉 차단 시설이 없는 장소에서 접견 시간의 제한 없이 변호인과 접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형자의 경우 이러한 접견이 보장되지 않고 일반 접견만 허용되고 있습니다. 즉, 면회시간이 10여분으로 제한되어 있고, 칸막이가 설치된 접견실에서 서류 등을 같이 보면서 접견할 수 없어 소송 준비를 충분하게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3. 수형자 이아무개씨는 지난 4월부터 경북북부제3교도소에 수용되어 보호감호 집행을 받고 있습니다. 이씨는 2005년 사회보호법 폐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확정된 보호감호 판결의 효력은 유지된다는 부칙에 따라 보호감호 집행이 개시된 것은 부당하다며 우리 위원회에 공익소송을 신청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이 사건을 공익소송사건으로 선정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로 하고 허윤정 변호사를 담당 변호사로 지정했습니다. 이씨는 지난 5월 6일 변호사와 소송위임계약을 체결했습니다.

4. 5월 13일 허 변호사는 소송 준비를 위해 경북북부제3교도소를 방문하여 접견 신청을 했습니다. 허 변호사는 소측에 변호사 신분증과 이씨와의 소송위임계약서를 제시했고, 수임한 소송의 진행을 위해 접견을 신청했음을 설명했습니다. 허 변호사는 △접촉 차단 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장소에서의 접견 △회당 접견시간이 제한되지 않는 접견 △접견횟수를 제한하지 않는 접견 △교도관이 참여하지 않는 접견 △접견 내용이 청취, 기록, 녹음, 녹화되지 않는 접견 등 미결수용자의 변호인 접견과 동일한 조건의 접견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측은 허 변호사가 청구인의 소송대리인이라고 하더라도 청구인이 수형자이므로 현행법상 미결수용자의 변호인 접견과 동일한 조건의 접견이 불가하다며 변호사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별첨1. 사실확인서)

5. 2009년 4월 법무부는 ‘기결수형자에 대한 변호인 접견 관련 업무 기준’을 산하 교도소·구치소에 하달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추가 형사 사건으로 수사 또는 재판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징벌 등 행정처분에 대해 행정소송, 헌법소원을 제기한 경우 △국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경우 △형사 판결에 대해 재심 청구를 한 경우에는 변호인 접견교통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별첨2. 기결수형자에 대한 변호인 접견 관련 업무 기준 시달)

6.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수형자는 확정판결을 받았으므로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형자라 하더라도 원 사건과는 별개 사건으로 변호사의 조력이 필요한 것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재판청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판’이란 △민사재판 △형사재판 △행정재판 △헌법재판 모두를 의미하며, 특별히 ‘형사재판’의 경우에만 더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편, 재판청구권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충실한 공격권과 방어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재판청구권이 단지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형식적인 의미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법률적 쟁점이 있으며 △어떠한 소송방법에 의하여 구제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지 등에 있어서 법률전문가의 서비스를 받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청구권이라는 헌법적 권리가 실제로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7. 특히 구금되어 있는 수형자가 재판청구권을 실효성 있게 행사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적정한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헌법에 근거하여 인정되어야 합니다. 특히, 수형자가 교도소 내의 부당한 처우나 교도관의 불법 가혹행위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때 구금상태라는 제약과 자신의 직속 통제기관과 쟁송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송 상대방과 대등한 지위에 설 수 없습니다. 수형자의 이러한 조건은 형사절차상 검사와 법적 논쟁을 벌여야 하는 구속 피고인의 불리한 지위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수형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받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면, 이는 헌법상 보장된 재판청구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8. 해외의 경우, 독일은 행형법 26조를 통해 수형자와 변호사의 접견을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수형자와 민사사건의 소송대리인인 변호사와의 접견에 대해 당해 민사사건의 상담 및 사전 준비에 지장을 초래하는 정도의 접견 제한은 허용되어서는 안되고, 이 점에 대해서는 소장의 전적인 자유재량으로 해석할 수 없다”, “접견시간의 제한이 소송준비를 위한 사전준비에 대한 직접의 제한이고 … 본건에서 접견시간을 30분 이내에 제한하는 것이 처우상은 물론 형무소 내의 규율질서상의 필요가 있다고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도쿠시마형무소 소장이 본건 각 접견에서 30분 이내로 하는 조건을 단 것은 재량권을 일탈 내지 남용한 것이다”라고 판시한 판례가 있습니다.

9. 한국의 경우에도 수형자가 소송 제기 여부를 협의하고 소송자료 등을 확보하기 위하여 변호사에게 서신 등을 발송하려고 하였으나 교도소 측이 발송을 불허한 사건에서 법원은 “원고가 위 집필문서를 자신의 변호사에게 발송하여 소송자료로서 전달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중요한 증거방법인 위 집필문서를 변호사에게 발송하지 못하도록 한 뒤 이를 폐기한 것은 원고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서울지방법원 2002. 6. 20. 선고 2001나57883 판결)라고 판시함으로써 소송 준비를 방해한 행위가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10. 이 사건과 비슷한 사안에서 2004년 헌법재판소는 “기결수형자는 형사소송 절차 중에 있는 미결수용자와는 신분이 다르며, 기결수형자에게도 민사, 행정 등의 소송 계속 여부에 관계없이, 접견횟수 제한과 무관하게 접견이 허용된다고 하면 소송을 빙자하여 변호사 접견을 하려는 수용자를 제재할 수 없게 되어 수형자의 접견 횟수를 제한하는 규정의 취지를 몰각함은 물론 수용질서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합헌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헌법재판소 2004. 12. 16. 선고 2002헌마478 결정). 그러나 합헌 결정 이후 10년 가까이 지났고 재판관도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수형자라 하더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헌재가 전향적인 결정을 할 것을 기대합니다.

11.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12. 많은 관심과 보도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1. 사실확인서 (별도파일)
2. 기결수형자에 대한 변호인 접견 관련 업무 기준 시달 (별도파일)
3.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별첨3 :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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