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 성명/논평
[보도자료] 대법원, 군의문사 故민00 이병 국가유공자 인정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4-08-07 00:46:02  |   icon 조회: 6655
[보도자료]
대법원, 군의문사 故민00 이병 국가유공자 인정
암기강요, 욕설, 질책에 따른 우울증이 죽음 불러
가해자는 영창·휴가제한…솜방망이 징계
민관 합동 상설 조사기구 설치해야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지난 2010년 육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故민00 이병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지난달 24일 대법원 제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고인의 유가족이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요건비해당결정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심리불속행)하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고인은 경기도 양주시 소재 제5기갑여단에서 전차수리병으로 복무하다가 부대 배치 30일 만에 영내 야산에서 목을 매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별첨1. 故민00 이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3. 2012년 10월, 서울행정법원 행정3단독 문보경 판사는 “망인은 군 입대 후 선임병들의 암기강요, 욕설, 질책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우울증 증세가 발현되고, 소속부대 간부 및 선임병들의 적절한 관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우울증 증세의 악화에 따라 자살에 이르렀다고 추단함이 상당하므로 망인의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재판장 지대운 판사)도 같은 이유로 피고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4. 사망 후 군 헌병대 조사 결과 선임병들이 고인에게 지속적으로 질책 및 욕설을 하고 암기를 강요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가해자 김아무개 상병 등 3명이 영창 15일, 윤아무개 일병 등 3명이 휴가제한 5일의 징계를 받은 정도에 그쳤습니다. 한편, 고인의 소속중대 전입 직후 실시된 군 간편인성검사 결과, “인성 면에서 관심을 요하는 문제가 나타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한 심리현상을 보이며 자포자기에 의한 우발행동이 우려되므로 깊은 애정과 격려로 자신감과 자존감을 세워주십시오”라고 평가되었고 우울증 진단은 우울증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소속중대 중대장, 근무대장은 전입 신병이 병영생활에 조기 동화 및 적응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함에도 전입 당시 형식적인 1회 면담만 했을 뿐 지휘감독을 소홀히 했습니다. 소대장도 고인에 대한 체계적인 신상관리 및 병영부조리 색출 노력을 소홀히 했으며, 행정보급관도 고인의 전입 이후 면담을 전혀 실시하지 않는 등 근무를 태만히 한 점이 확인되어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간부들에 대한 징계도 견책, 근신, 감봉 등 솜방망이 수준에 그쳤습니다.

5. 그동안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순직군경’으로 예우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죽음의 경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자살로 처리된 채 같은 법 제4조 6항의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당해 왔습니다. 대법원은 “자해행위로 인한 사망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사망”이라며 사망 이전에 정신과 진단을 받은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인 사건만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왔습니다. 다행히 2011년 9월 국가유공자법 개정에 따라 예외사유 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가 삭제되었습니다. 대법원도 2012년 6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교육훈련 또는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데도 그 사망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자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존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6. 과거 군의문사 사건은 2009년까지 운영된 대통령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의 조사에서 선임병의 가혹행위 등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처럼 군의문사위가 문을 닫은 이후 발생한 군의문사 사건은 공정한 조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군의 조사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유가족들은 법원에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번 판결을 통해 확인된 사실관계도 군 헌병대 조사 결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민 이병의 유가족들은 고인이 확인된 사실 이상의 심각한 가혹행위를 당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가가 민관 합동의 독립적인 상설 조사기구를 설치하여 의문의 죽음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7. 우리 위원회는 이번 판결을 통해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해 온 유가족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군 복무 중 자살이 개인의 나약함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부는 비인간적인 군 복무 환경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군 복무 환경을 개선하고, 유가족들이 법원에서 국가를 상대로 길고 긴 싸움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사망 사건의 조사와 국가유공자 심의 과정을 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8.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이하 ‘기금’)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금은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의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 위원회는 유족의 뜻을 받아 2009년 5월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소속 변호사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9. 많은 취재와 보도를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1. 故민00 이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별첨1
故민00 이병 군의문사 사건 경과



■ 1990년
출생
■ 2010년 3월 22일
육군 입대
■ 2010년 6월 9일
5기갑여단 배치
■ 2010년 7월 10일
영내 야산에서 목을 맨 숨진 채 발견
■ 2010년 12월 22일
유가족, 서울남부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유족)등록 신청
■ 2011년 3월 8일
서울남부보훈지청, 국가유공자 등록 거부 처분
“부대의 소홀한 병력관리와 선임병들의 유형력 행사가 자살의 동기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우울증에 빠져 삶을 포기하게 할 정도였는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자유로운 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
■ 2011년 3월 17일
유가족,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공익소송 신청
■ 2011년 3월 18일
천주교인권위원회 공익소송소위원회, 공익소송 선정 의결
■ 2011년 6월 3일
유가족, 행정심판 제기
■ 2011년 10월 4일
중앙행정심판위, 청구 기각 결정
“고인의 사망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고인은 자해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고, 청구인의 주장과 같이 고인의 자살은 수인하기 어려운 국가의 가혹행위에 의하여 발생했다거나 정상적인 의사능력 또는 자유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 2011년 12월 1일
유가족, 행정소송 제기
■ 2012년 10월 24일
서울행정법원 행정3단독(문보경 판사), 원고 승소 판결
“망인은 군 입대 후 선임병들의 암기강요, 욕설, 질책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우울증 증세가 발현되고, 소속부대 간부 및 선임병들의 적절한 관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우울증 증세의 악화에 따라 자살에 이르렀다고 추단함이 상당하므로 망인의 직무수행과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
■ 2014년 4월 1일
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재판장 지대운 판사), 항소 기각 판결
■ 2014년 7월 24일
대법원 제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 상고 기각 판결(심리불속행)



별첨2
故유현석 변호사님의 걸어오신 길


유현석 변호사님은 1927년 9월 19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문과을류(법학과)에 들어갔으나 1946년에 하향, 서산법원 서기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1952년에 제1회 판사 및 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법무장교,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고등법원판사, 서울지방법원부장판사 등을 지낸 후 1966년에 한국최초의 로펌인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어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70년대 남민전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다.

1987년부터 1991년 2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직을 역임했으며, 199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률실무연구회 운영위원장에 선임됐고, 1999년 대한변호사협회 총회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원로회원으로, 언제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후배 변호사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셨다.

1950년 서산성당에서 유봉운 신부님에게 세례(세례명 사도요한)를 받은 이후, 교회 안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창립해 후배를 키우신 선각자이자 1992년 이후에도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늘 천주교인권위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또한, 1992년 한겨레신문 자문위원장을 비롯해, 1997년 경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9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문, 2002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등 여러 사회단체의 좌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자 용기 있는 법조인으로, 지혜로운 예언자의 모습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사건의 대통령 대리인단 대표로 법정에 서신 것이 마지막 재판이 되었다.

유현석 변호사님은 2004년 5월 25일 선종하여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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