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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요청] 희망버스 송경동·정진우·박래군 1심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
icon 천주교인권위
icon 2014-12-02 12:36:49  |   icon 조회: 5632
취/재/요/청

희망버스 송경동·정진우·박래군 1심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

2일(화) 오후 2시, 부산지법 301호에서 1심 선고
선고 직후 입장 발표 기자회견 예정

1. 공정보도를 위해 애쓰시는 귀 언론사에 경의를 표합니다.

2.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서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혐의로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 등으로 기소된 송경동(시인)·정진우(노동당 부대표)·박래군(인권중심 사람 소장)씨에 대한 1심 선고기일이 오는 2일(화) 오후 2시, 부산지법 301호 법정에서 열립니다. 선고 직후 피고인들은 선고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부산지법에서 열 예정입니다. (※기자회견 장소는 현장에서 안내해 드립니다.)

3. 이 재판은 2008년 촛불집회의 야간시위 위헌제청 사건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습니다. 그동안 희망버스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5명이 구공판 기소되었고 130여명이 구약식 기소된 후 정식재판을 청구했습니다. 이들이 약식명령으로 받은 벌금액수는 1억5천여만원으로 잠정 집계되었습니다. 이들의 재판도 최근 재개되었습니다. 이번 선고는 5차례에 걸쳐 진행된 희망버스에 대한 법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다른 희망버스 재판에 중요한 선례가 될 것입니다.

4. 지난 10월 14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송경동씨에게 징역 3년, 정진우씨에게 징역 2년, 박래군씨에게 징역 10월을 구형한 바 있습니다. (※별첨.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많은 관심과 취재 부탁드립니다. (끝)

※별첨.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 송경동 (시인)

다른 구체적인 범법 사실들에 대해서는 재판 과정에서, 그리고 변호인들께서 충분히 말씀해주셨다고 보기에 저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드려보고 싶습니다.

2003년.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한진중공업노조지회장 김주익이었습니다. 그해 6월 11일 그는 동료들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혼자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미 600여명의 동료들이 정리해고 등으로 잘려나갔습니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명에게 18억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 고발하고,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천억 매출에 23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고, 사주인 조남호 회장은 해마다 50억에서 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것은 각종 탄압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129일이 되던 날 난간에 자신의 목을 매달았습니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끝내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해 또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였습니다. 그는 정리해고의 광풍을 벗어난 일명 ‘산 자’였습니다.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고 슬퍼하던 그의 주검은 수십미터 아래 도크 바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관과 땅 밑에서 올라온 관이 만나는 눈물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정갑순은 지금도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만 봐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지고서야 그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는 중단되었습니다. 경영이 어려워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김주익과 곽재규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조선소 안에 지어지고, 30억을 들여 식당이 새로 지어지고, 임금과 성과급이 올라갔습니다. 다시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11년 1월 6일 새벽. 그 85호 크레인을 혼자 오르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기 와 있는 김진숙 씨였습니다. 그는 지난 8년동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다 했습니다. 김주익에게 미안해서였다 했습니다. 8년만에 목욕탕엘 갔다오고, 8년만에 방에 보일러를 켠 그가 밤늦게 나가 새벽에 문자를 보내왔다고 했습니다. ‘놀라지 말고 책상 위 편지를 봐’.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85호 크레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번민했’다는 편지였다고 했습니다. 자신만은 ‘주익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한진중공업엔 우리들만 다닌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맘놓지 못했던 아내들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들도’ 다녔던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수십년간 ‘일요일날에도 특근 나가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우리가 어떻게 경영을 어렵게 했냐고 했습니다. ‘지 마누라, 지 새끼 옆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냐고 했습니다. 자신은 ‘예준이가 두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민석이가 세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유주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다림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도, 현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이 공장에서’ 지켜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경영상의 위기라 했지만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빅에 2조원대의 공장을 짓고 2만여명의 다국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측은 경영상의 위기 요건을 만들기 위해 약 서른 척의 배의 수주를 모두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빼돌려 왔습니다.

그가 영하 10도의 한파 속에서 한발 한발 죽음의 크레인 위를 오를 때 저는 서울의 한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641,850원을 받고 일하다 쫒겨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다 사고로 한쪽 발목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였습니다. 두 달 병원 생활을 하고, 다시 집에서 두 달을 요양할 동안에도 그녀는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김진숙 개인만이 아니었습니다. IMF 구조조정 이후 그렇게 정리해고 되어 간 수백만 명의 평범한 한국 노동자들의 가냘픈 운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힘내라고, 제발 죽거나 다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손 한번이라도 흔들어주자는 것이 희망버스였습니다. 그런 희망버스의 진정한 배후 조종세력은 약속을 위반하고, 기업의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마저 헌신짝처럼 버린 사측이었고, 소수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만이 보장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였습니다. 사회구성원 대다수를 이루는 1700만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비정규직화와 정리해고 요건 완화를 승인해준 우리 사회의 비민주적이며, 비인간적인 제도였습니다.

3.1만세 운동이나 광주학생의거의 진정한 배후가 유관순 열사나 그 어떤 정치세력이 아닌 일본제국주의였듯이, 4.19혁명의 진정한 배후가 무슨 조직된 학생운동 조직이 아니라 부패한 정치권력과 사회구조였듯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후가 무슨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군부독재체재와 그 잔혹한 탄압이었듯이 희망버스라는 사회적 시간의 배후는 1700만 노동자 가족들의 삶을 위협하고, 실제 파탄에 이르게 하는 이 잔혹한 정리해고-비정규직화 시대, 그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과 모순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희망버스라는 불특정의 운동에 단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내 일처럼 주체가 되어 움직였는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희망버스 운동을 통해 하나의 진실이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한진중공업에는 어떤 경영상의 위기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정에 조남호 회장은 두 차례에 걸쳐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고, 전국민에게 생중계되는 국회청문회와 국정감사장엘 서야 했습니다. 명분 없었던 정리해고는 다시 철회되었고,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만연했던 무분별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에 경종이 울리고, 모든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를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희망버스의 이름 없는 승객들의 헌신적인 사회연대의식, 희망버스를 지지했던 수많은 국민여론이 없었다면 가능치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진숙 씨가 자신의 발로 85호 크레인을 내려오던 날은 그간 어두웠던 한국사회가 한순간 밝아지고, 기뻐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국민들의 생존권과 노동권도 조금은 존중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사회적 희망이 잠시 빛나던 날이었습니다. 모두가 나서서 함께 힘 모으면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바를 이렇게 바르게 만들어 갈 수도 있지 않겠냐는 민주주의의 희망이 열리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후 3년은 평범한 보통 국민들에게는 다시 힘겨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한진중공업에서도 1년 이내 복직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가운데 그간 다시 절망한 두 명의 노동자와 희망퇴직자들 중 한 분이 생계비관으로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최강서 님과 김 모, 최 모님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동료의 관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을 봐야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기본권은 늘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앞에서 형애화되기 일쑤입니다. 이 추운 계절이 언제쯤이나 끝이 날까요.

올해 7월,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국 재벌기업들이 재투자하거나, 사회 재환원을 하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사내유보금이 515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체 기업도 아니고 삼성, 현대, SK 등 10대 재벌이 보유한 금액입니다. 5년 전인 2009년의 271조원에 비해 90.3%나 급증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IMF 구조조정 이후 1000만 명에 이르는 한국 국민들이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기업들의 자산 규모는 배 이상 더 커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꾸준히 모든 물가와 이자와 지대는 올라 전국민이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소비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에게 미래의 신용(노동과 삶)을 앞당겨 저당잡히게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올해 기준 현재 한국민의 가계부채는 104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2008년엔 724조원이었습니다. 전체 한국민들은 4년여를 죽어라고 일해서 빚만 200조원 가량 더 진 셈입니다. 국민1인당 소득은 3만불 시대를 바라본다 하고 기업들은 커나가는데 국민들은 점점 빈곤과 불안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과문하지만, 국가의 존립 근거와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고루 평화롭고 평등하며,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분배의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듯, 사회 구성원들 전체의 협동의 산물에 다름아닌 사회적 자본 역시 조금은 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고, 지속가능한 모두의 미래를 위해 공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일하는 국가만이 모든 주권자들 모두의 국가로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의가 현저히 훼손되거나, 소수의 자본가들 편으로 완연히 기울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런 부정의를 존속시키기 위해 각종 부패와 여러 형태의 폭력이 판을 칠 때, 그런 소수의 무한한 행복만을 위해 너무도 많은 공동체 성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역사 이래로 확인했듯 다수 주권자들의 저항과 문제 제기와 사회적 평형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인 민주주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한 사람의 사회적 진실을 쫒는 시인으로서,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 시대의 정의가 무엇일까를 쫒았습니다. 더 많은 이들의 행복과 삶의 해방을 위해 어느 곳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합니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가는 노선이 어디 있는가를 찾는 와중에 희망버스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습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희망버스라는 사회적, 공동체적 연대운동이 불법화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 영광이나, 고초를 떠나 그런 불법화가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미래에 좋은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히나 사회적 다수이면서도 권력과 부의 소수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여 저는 이 법정이 선한 사람들의 연대에 손을 들어주는 역사의 법정이 되어주시기를 소망해봅니다. 저는 이 법정이 소수의 무한정의 이윤 추구보다 다수의 소박한 꿈들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지해주는 다수의 법정이 되어주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저는 이 법정이 모든 원인에 대해 눈을 감고 실정법이라는 것에 눈먼 법정이 아니라 그 과정의 진실과 모두의 미래를 향해 열린 법정이 되어주시기를 소망해 봅니다.

○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

벌써 삼년이 되었네요. 재판부를 포함해 재판 진행을 위해 힘써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특히 지금 이 시간에도 법원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법원노동자들과 구성원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전합니다.

삼년 전 겨울, 푸른색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 들어설 때가 기억이 납니다. 무척 긴장을 하였지요. 지금 방청하는 분들께서는 의외라 여기시겠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유치장이란 곳을 부산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감옥까지 들어가 팔도 제대로 펼 수 없는 조그만 독방에 갇혔으니 얼마나 낯설고 깜깜하였는지 모릅니다. 다른 재소자들과 동승해 교도소에서 법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서 포승줄에 꽁꽁 묶인 불편한 몸이었지만 애써 맘을 잡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저 같은 사람 하나 더 처벌하는 것을 통해 희망버스를 범죄로 몰아가려 하겠지만, 진정 우리 사회에서 단죄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담담하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뒤늦게나마 희망버스에 탑승하고, 기꺼이 나비가 되어 85크레인으로 날아간 이유에 대하여.

피고인 자리에 앉아 검찰의 주장도 애써 들어보았지만, 이런 식으로 재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법리적 공방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기본적인 사실 관계조차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1차 희망버스라고 이후에 명명된 바로 그 날, 저의 혐의사실로 “무단으로 도로를 행진한 후에 사다리를 타고 공장 담벼락을 넘어갔다”는 것이 적시되어 있었지요. 당 전국위원회를 마치고 당원들과 함께 출발하여 뒤늦게 공장에 도착하였고, 이미 무언가 상황이 종료되어서인지 경찰의 주차안내까지 받으며 편안하게 걸어서 공장 정문으로 들어갔는데도 말입니다. 휴대폰도 압수되고 위치추적까지 해갔다는 통지서도 받았는데, 증거확보는 고사하고 육하원칙도 짜 맞추지 않고 일단 기소하고 보는 것이 검찰의 관행인 것일까요? 심지어 구속시키려고 선택한 주동자에게 말입니다.

그나마 실정법 위반이라고 공방이 될 만한 것으로는 3차 희망버스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편에 대해 승차안내를 한 것이 있겠네요. 정당연설회 방송차량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로 돌아가는 승객들에게 지역별 차량의 주차 위치도 안내하고, 분실물도 찾아주는 등 몇 가지 지원활동을 했습니다. 100대가 넘는 차량에 수많은 사람들을 탈 없이 신속하게 탑승시키기 위해 목이 쉬어가며 정신없이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것을 집회라 부르든, 그 무엇이라 규정하든, 그런 걸 다 인정하더라도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것까지 징벌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당일 현장에서 지켜보던 경찰도 결국은 빨리 귀가하기를 바라는 입장이었을 것이고, 피곤에 지친 승객들조차 아쉬운 헤어짐이지만 차분하게 마음 모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시간을 끝까지 함께 잘 만들어냈는데도 말입니다.

2년. 검찰이 오늘 제게 구형한 숫자입니다. 헌법소원이 받아들여지고, 곳곳에서 증인들이 불려나오고, 변호인들이 준비한 소중한 변론을 남기고, 그렇게 길고 긴 재판을 끝내며 결국 검찰은 제가 감당해야 할 징역의 형량이라며 저런 숫자를 던지고 마는군요. 저의 죄 값을 측량한 저 숫자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 굳이 따질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차라리 처음 재판정에 들어서며 스스로 다짐했던 것을 다시 전하며 저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희망버스 승객의 하나로서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희망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의 책임과 대가로 우리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법의 이름으로 겸허하게 묻고 답하고, 또 함께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의 답으로 2년이라고 써냈지만, 저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건의 당사자로서 제가 찾아가던 질문이나마 재판부에 진솔하게 전합니다.

법원은 얼마 전 “대공장 사내하청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불법파견이고 위장도급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법파견을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들을 구속하거나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법’이고,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지 않는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법은 그렇게 상반된 두 개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고, 그런 것을 법의 이중성이라고 하는 걸까요?

85크레인에 있는 어느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소박하지만 절박한 마음들이 모여 시작된 희망버스.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아름다운 연대와 희망의 상징으로 조명받기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외부세력의 개입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도 했지요. 사회적 토론과 공감이 확산되며 많은 귀감과 교훈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또 하나의 심판, 아니 이 모든 공동의 모색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함께 이루어낸 것, 여전히 넘어서야 할 것을 찾아내던 우리사회의 포용력과 다양한 상상력까지도 이제 죄의 유무와 형벌의 크기로 대체되어 답해야 할 때입니다. 최후진술에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선처의 호소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재판부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던 질문을 재판부에 감히 돌려드립니다. 어떤 얼굴로 재판정에 들어오실 것인지요? 법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요?

검찰은 이 재판이 남겨야 할 답은 물론이고 이 재판을 구성해야 할 증거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실은 애초에 왜 우리를 가두어야 했는지, 그 이유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보석으로 석방되고 처음으로 희망버스에 대한 저의 의견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희망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 지에 대한 저의 답입니다.

“담벼락 밑에서 7박8일을 혼자서 서성거리며 버틴 사람. 유럽 유학중에 귀국해서 크레인을 먼저 찾는 풍경.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맞으며 밤을 새는 시민들과 72시간 연속 정당연설회를 개최해 투쟁의 공간을 확보한다는 구상. 경찰청 건물 주변을 돌아 줄지어서 버스에 승차해보겠다는 이상한 발상. 영도가 워낙 좁아서 일만이 모여 공연 할 장소가 없으니, 차라리 차벽을 설치해주면 신나게 놀아보겠다는 가수들...”

희망버스의 진정한 실체는 어쩌면 검찰이 공소장에 써내려간 그 희망버스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당연설회 차량을 운행하고,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고, 또 영도에 오지 못하는 전국의 시민들과 트위터를 주고받으며, 85크레인이 보이는 곳에서 밤이슬을 맞고 함께 노숙하는 시민들에게 그 마음을 전달하던 시간. 희망버스라 불리던 날도 아니고, 공소장에 들어갈 항목도 없고, 어떤 범죄혐의를 내세울 수 있을지 검찰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들. 제가 함께 한 그 작은 것들이 희망의 날갯짓이었다면, 저는 희망버스의 자발적 기획자이고, 진짜 승객이었다고 자부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지라도 아름다운 연대의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들,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법이 어떤 얼굴을 하고 누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아직 자신 있게 답하지는 못합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저 자신이 그리고 함께 했던 이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말하며 새로운 희망의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구속과 재판, 험한 길을 걸으며 더욱 단단히 깨닫습니다. 희망은 누군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손을 내밀며 함께 잡는 것이라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저의 이름을 그래서 다시 기억해냅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냈던 절박한 그 외침, 우리 모두가 김진숙입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모두가 기획자가 되었습니다. 함께 날아가 스스로 희망이 되었습니다.

끝까지 마음을 열고 들어주셔서 용기를 냈습니다. 꿈꾸는 자들이 갇히는 것이 아니라, 더 따뜻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로운 판결을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사법적 판단과는 관계없이 희망버스는 연대 운동의 새로운 바람을 우리 사회에 선보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준 것만으로도 희망버스는 너무도 정당했습니다. 억압이 있고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지금도 희망버스는 달려가야 합니다. 희망버스 승객이었음을 저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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