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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천주교의 국가보안법폐지운동에 담긴 종교적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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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1:44:54  |   icon 조회: 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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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국가보안법폐지운동에 담긴 종교적 명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신앙인들


성 염

서강대 철학과 교수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 보기

천주교는 서기 2000년을 종교상의 대희년(大禧年)으로 정하여 성년 맞이에 교회 안팎의 힘을 모으고 있다. 까마득한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인들이 50년마다 농사짓던 땅을 놀리고 종들을 풀어주며 빚을 탕감해주고 원한을 서로 풀던 습속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성년에는 신앙과 삶을 쇄신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가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표어가 되어 있다.

한국천주교의 북한문제 공식창구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이다. 이곳의 공식 발언은 보혁이 공존하는 한국 천주교의 정리된 입장이라고 간주할 만하다. 그런데 이 기관이 일찍이 한국천주교신도들을 상대로 하여 "2000년 대희년의 출발점은 (남북간의) 조건없는 용서와 화해"라고 천명하였다.(1996.12.1)

한국천주교는 해마다 6월이 오면 한국전쟁의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아물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6월 26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고 "반세기 동안이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면서 불목하여 온 우리 민족사회가 참다운 화해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한다. 벌써 십여년전에 <천주교 사회사목을 위한 의식조사>에서 천주교 응답자 75.6퍼센트가 "교회가 민족통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대답한 바 있었다. 한국 천주교의 기본입장은 "온 세계가 평화를 염원한다"는 교황의 당부대로 "평화는 용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용서와 사랑만이 평화의 강을 이루어 놓는다"(1994.6.26: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성명서)는 것이다.

3년전 강릉잠수함침투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적에도 북한선교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하여(1996.12.1) "용서와 관용이 사라지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화해하는 복음적 정신을 외면하는" 정국을 통탄하면서 남북한 당국에도, 가톨릭신자들에게도 "사랑과 용서의 문을 열고 대화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것"을 촉구하였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작년에 이어 계속된 수해로 고통받는 북한사회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라도 조건없이 도와야 한다"고 천명하였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어려워질수록 끝없는 사랑으로 형제의 마음을 돌려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도리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국방력이나 국가보안법을 내세워서가 아니라 "용서를 무기로 하여" 북한사회에 대응하자는 호소도 그 성명에 담겨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다"(인간의 구원자, 14항)고 하였다. 어느 법률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유린한다면, 특히 사회의 약자들이나 그 약자들을 편드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투옥하고 죽인다면 신앙인은 순교자다운 기개로 이 법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는 말씀대로, 무죄하면서도 현행 국가보안법 같은 법률에 희생당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 앞에 책임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걸어야 하는 길은 "인간"을 살리고 구하는 길이지 공산주의나 반공의 이데올로기를 신성시하고 투신하는 길이 아니다. 한반도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관심사는 반공이 아니라 민족의 구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자본주의든 집단주의든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고 촉진되는 한에서는, 교회가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며 "교회의 사회교리는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양편에 다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사회적 관심 21항)고 분명하게 밝혔다. 교황은 80년대에 미국과 소련 "두 블럭 다 자체 안에 보통으로 말하는 제국주의, 아니면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로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사회적 관심, 22항).

또 교황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나누어진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사회적 관심 36항)고 선언하였고 한국을 첫 번 방문하였을 적에 동서 이데올로기와 남북 빈부문제를 가장 비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곳이 한반도라고, "분열된 세계의 상징"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익이다, 너는 좌익이다."하는 말이 신앙의 관점에서는, 본인이 죄스러운 이데올로기 구조에 예속되어 살고 있다는 자백처럼 들린다.

그래서 신앙인은 반세기 동안 이 땅을 분열시켜 온 좌우익 논리가 민족 번영을 찾는 화해와 통일 논리로 바뀌도록 노력한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할 적에는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자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자유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사이에서" 내리는 선택이 아니고, 나자렛 사람 예수 앞에서 내리는 신앙의 결단밖에 없다. 현교황의 주장대로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선택"(사회적 관심, 41항)밖에 없다. 종교인은 민족공동체나 인간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울 권리가 없다.

그런데 그 예수는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 반란자로서 처형을 당하였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두 세력, 즉 외세였던 로마 제국과 그 외세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던 대제관과 바리사이파에 의해서 제거되었음이 확실하다.



예수의 운명과 국가보안법

우선 그리스도인들이 심정적으로 국가보안법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면, 그 까닭은 그들이 구세주로 받드는 예수가 당대에 국가보안을 명분으로 사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내세우는 법률이 나오면 일단 주님의 억울하고 무죄한 죽음을 떠올리면서 또다시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을까 의구의 시선을 돌린다.

성서를 보면 예수가 죽은지 나흘이 넘어 장사까지 치룬 라자로를 되살려 동굴무덤에서 불러낸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유다지방에 쫙 퍼졌다. 이 엄청난 소문이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들의 귀에 들어가자 예루살렘에서는 즉각 최고의회가 소집된다. "이 사람이 많은 이적을 행하고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터전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낸 기적이 의회 원로들에게 나자렛사람 예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아보게 만들기는커녕,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해괴한 결론을 끌어낸 것이다. 최고의회 의장을 겸하던 대제관 가야파의 발언은 더 기막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서 죽고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이롭다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는군요." 다른 죄가 없더라도 국가안보를 위해서 예수는 죽어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요한 복음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맺는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자는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요한 11,45-57) 신고 않는 자는 불고지죄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대제관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린 예수의 기적에 당대의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사형을 결정한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성직자 대제관들이요 오로지 하느님 계명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평신도 지도자 바리사이들이었다! 그런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 천주교신자들은 한국사회의 남북화해를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을 유지시키는 것은 하느님과 민족앞에 죄짓는 일처럼 느껴져 이 법을 철폐하기로 나섰다.

지난 7월 12일 결성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모임>을 주축으로 하여 한국천주교가 국가보안법폐지에 발벗고 나선 데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신앙상의 논거

첫째로, 불법한 입법자가 불법하게 만든 법률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현행국가보안법은 1980년 12월 31일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관이 만든 법으로, 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씨가 그해 5월 18일 쿠데타로 헌법을 파괴한 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를 대행시킨 위헌기관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97년 반란 및 내란목적 살인을 저지른 집단으로 역사적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반란집단이 불법으로 급조한 입법기관이 만든 이 법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5.18 군사반란을 편드는 짓이고,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하겠습니다."라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신앙인들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고 한다.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말은 천주교신자에게 아무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서양 오랑캐들이 들여온 삿된 가르침을 신봉하지 말라!"는 국법과 왕명을 어기고 천주교를 믿다가 목숨을 잃은 3만 명의 순교선열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처음 한 세기 동안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고 불렸다. 실정법과 양심법의 대립에서 실정법을 무시하고 양심을 지켜 온 것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이다.

둘째로,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고 현대 유람선이 금강산을 오가며 남한이 북한에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어주고 식량원조를 보내는 마당에,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거나 극구 반대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은 없다. 천주교내에도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추진하는, 북한선교위원회라는 공식 기구가 있고, 레지오 마리애니 푸른군단이니 다락방이니 하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단체도 많다.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도 러시아가 회개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었고 그 기도대로 러시아 스스로 현실사회주의를 포기하였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전세계가 합법적 국가로 인정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반국가단체라고 단정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과 교류를 범죄시하고 있다. 북한을 붉은 악마같은 반국가단체라고 욕하고 증오하면서 북한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그들과 화해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얼마나 신앙에 어긋나는지 천주교신자들은 잘 알고 있다.

셋째로, 38선의 분단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다. 헌법(제 4조)에도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기해 놓았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무력과 전쟁에 의한 북진통일 이외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7.4성명이나 남북한 정부의 모든 외교문서는 연방제 형태의 통일방안을 추진하면서, 국민에게는 적화통일이나 북진통일 중의 하나가 이루어질 것처럼 오도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목표는 마치 적화통일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국민에게서 통일에의 의지를 꺽어 버리고 희망을 좌초시키는 데에 있지 않나 의심받는다. 평화의 사도로서 전쟁을 증오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력으로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이 법률이 남북의 분단을 영속화하는 법제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이 법률 폐지에 앞장선다.

남북한 어느 쪽이든 "긴장과 대립 상태를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감정적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켜 나간다면, 결코 민족사회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는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로 단죄되지 않을 수 없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1996.12.1 성명)고 천주교는 선언한 바 있다. 한반도라는 공간은 증오에 찬 범죄의 공간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구원의 공간이 된다. 남북분단을 영구화할만큼 분열을 조장하고, 공산주의자라면 모조리 섬멸하겠다는 증오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고 악마에게서 오는 까닭이다.

넷째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는 형벌 법규는 구체적이고 명백해야 한다. 명료하지 아니한 것은 용도가 의심스러운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을 말한다"고만 규정할 뿐, 정부참칭이나 국가변란이 무엇이고 내용이 무엇인지 명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7조에서 "반국가단체와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자"를 처벌하는데, 찬양 고무 동조의 개념 역시 지극히 애매모호하여 아무에게나 씌울 수 있게 되어 있다.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일찍이(1982.12.5: 인권주일 담화문) "국가보안법의 무차별적인 적용과 처단으로 국사범에 대한 인식에 혼동을 가져오게 하고 관제 공산주의자자가 생기는" 것과 그 무렵 "신앙공동체 활동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처벌되는 사례"를 지적하면서 심각한 우려와 비판을 가 한바 있다.

북한으로부터 파송된 간첩도 아니고, 더구나 본인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들,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학생들, 쿠데타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지식인들과 성직자들을 군사정권이 국가보안법에 걸어 처벌해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실제로 지난 세월 이 법률로 남파간첩이나 공산당원을 붙잡아서 처벌한 실적은 미미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집단과 운동을 "반국가단체"라는 모호한 죄목으로 걸어넣고 양심범이 철창에 갇히다보니 전세계 지식인들한테서 우리나라가 정치적 미개국으로 조롱받고 있다. 상식있는 사람치고, 국가보안법이 온존하는 한, 남북간에 별의별 문서합의와 고위층회담이 있어도, 남한 정부의 통일의지를 믿지 않을 것이다.



마몬의 가면을 벗기면서

"엄연히 남침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공산당이 38선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데 이 법률을 폐지하여 어쩌자는 말이냐?" "북한에도 사회안전법이 있지 않느냐?"라는 반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어리석은 말로 들린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5,20) 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이빨은 이빨로, 눈은 눈으로 갚겠지만, 신앙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한다. 북한선교위원회가 "용서를 무기로 하여" 북한사회에 맞서겠다는 태도를 표명한 배경이 여기 있다.

종교가 말살되었다는 북한과 크리스쳔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고 자랑하는 남한은,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먼저 용서하고, 누가 가난한 약자를 더 돌보느냐로 우열을 가려야지, 누가 더 악질적이냐로 승부를 걸어서는 안된다. "공산당들은 제 부모도 당에 고발하는 패륜아란다."고 가르치는 대한민국에 남편이나 부모, 스승과 친구를 빨갱이로 고발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처벌하는 반인륜 법률이 있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는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 반란자로서 처형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성경에서 읽은 신앙인들은, 예수가 무죄함을 알고서도 유대인 정치권의 압력에 못이겨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면서 "나는 이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소.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대답하여 "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말도 기억한다.(마태 27,24-25) 그들의 장담은 30년도 못되어 로마군대의 예루살렘 함락과 전시민의 학살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해방후에 이남에서만도 제주 4.3 사태, 여순사태, 대구사태로 이어지는 엄청난 동족 학살, 저 무죄한 죽음들의 피값이 6.25라는 전쟁의 참화로 남북한 온 민족의 머리 위에 쏟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종교적 해석을 한다.

기원전 5세기,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느 날밤에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성전을 버리고 떠나가는 장면을 보았고 며칠 후에 수도가 적군의 손에 떨어짐을 목격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들, 가난하고 힘없고 무죄한 사람들이 어떤 악법에 의해서 짓밟히고 희생당하는 땅에서는 국민의 마음이 떠난다. 그리고 국민의 마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영광도 떠나버린다. 종교인들은 거기서 전쟁의 참화와 한 민족의 멸망을 예견하고 공포에 떨게 된다. 신앙인은 "북괴 김일성의 남침"이니 "미국의 핵우산"이니 하는 것 말고도 하느님도 계심을 믿고 그분의 정의로운 손길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민족화해와 북한선교를 염원하는 천주교는 그 신자들이 필히 갖추어야 할 통일영성(統一靈性)으로서, 아마도 국가보안법의 뿌리가 되는, 증오에 찬 반공(反共)을 극복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반공이 자칫하면 우상숭배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느님보다 앞세운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공산주의자들을 무신론자라고, 종교자유를 안 준다고, 사유재산과 자유를 빼앗는다고 증오하고 그래서 국가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도들에게는, 그 본심이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을 안전하게 보전하려는 욕심, 못 가진 자들과 약자들로부터 기득권을 보호하는 폭력에 있지 않는지 하느님 앞에서 살피도록 교회는 간곡하게 권유한다.

"내 주먹에 쥔 것은 죽어도 내놓지 않겠다"는 마음씨를 이름붙여 예수는 "마몬"이라고 불렀다. 주먹에 쥔 것 나눠먹으라고 말해오는 자라면 그가 노동자든 학생이든 지식인, 심지어 신부, 주교든 상관없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욕하거나, 저사람들이 붙잡혀들어가고 퇴학당하거나 해직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어갈 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한반도 반세기 동안 마몬이 남한사회에 뒤집어씌운 국가보안법이라는 탈을 벗어던져야겠다고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인류 역사상 국가보안법의 최초 희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2002-05-10 11: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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