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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동티모르의 인권상황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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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1:56:51  |   icon 조회: 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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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의 인권상황과 독립운동

동티모르 인권상황과 독립운동의 전망(1999년)

조용환

나는 눈물속에서 자라났고 눈물속에서 살고 있으며 눈물속에서 죽을 것이다.
나는 태어날 때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19세의 동티모르 청년 -

해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부담과 실망, 비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민중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티모르민중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태초로부터 미래는 희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변화를 약속해 왔습니다. 미래는 진실이 거짓을 이기고 정의가 범죄를 물리치는 승리의 순간을 가져올 것입니다. - 자나나 구스마오 -

서론 | 동티모르의 역사 | 현재의 상황과 문제점 | 독립운동과 인권의 쟁점들 | 국제사회와 동티모르 | 국제관계

1. 서론
인도네시아와 호주, 파푸아뉴기니 사이의 남태평양에 떠 있는 티모르(Timor)섬의 오른쪽 절반.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20년넘게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티모르의 가톨릭지도자 벨로(Belo) 주교와 모베레민족저항평의회(National Council of Maubere Resistence; CNRM)의 외교대표 호세 라모스 호르타(Jose Ramos-Horta)에게 올해 노벨평화상이 수여된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준 것 같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는 시기가 문제일 뿐 이들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있을 만큼 동티모르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동티모르가 냉전을 배경으로 약소민족을 노예상태에 빠뜨린 강대국 패권정치의 상징적인 사례로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인권과 평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열망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티모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국제사회로부터 폐쇄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한편 우리의 시야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에서 동떨어진 채 편협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글은 동티모르문제의 배경과 현황을 소개하고 이 문제가 가진 국제적 맥락을 해명해 보고자 한다.

2. 동티모르의 역사
동티모르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인종과 언어, 종교 및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 섬은 고대로부터 말레이반도와 호주 및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 제도들 사이의 통로가 되어왔다. 근세이후에는 포르투갈을 통하여 라틴계통의 가톨릭문화가 수입되었으며 아랍과 중국 상인들의 왕래를 통하여 이슬람과 중국의 종교 및 문화에 노출되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당시 70-80%의 주민이 정령신앙(animism)을 가지고 있었으며 20%가 가톨릭을 믿고 있었고 30여개의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테툼(tetum)어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동티모르는 16세기에 특산물인 백향목(sandalwood)을 거래하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하여 서구에 알려진 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서티모르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서티모르는 1949년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으나 동티모르는 1974년까지 포르투갈이 관할권을 가지는 `비자치지역', 즉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1960년 12월 15일 유엔총회결의 1542호(XV)).   1974년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자 동티모르에서는 Fretilin(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과 UDT(티모르민주동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주로 교육받은 젊은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Fretilin은 농촌개발과 토지개혁, 대중교육과 빠른 독립을 내세워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반면 보수적인 엘리트와 토지소유자, 전통적 지배계급으로 구성된 UDT는 기득권의 상실을 염려하여 포르투갈과 연합을 주장하였다. 지지는 받지 못하였으나 인도네시아와 병합을 주장하는 Apodeti(동티모르인민민주협회)도 있었다. 1965년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 500,0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는 1974년 이후 동티모르에 대한 영토확장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군사활동으로 정세가 불안해지는 가운데 1975년 8월 UDT의 우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Fretilin은 11월 28일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12월 7일 3만명의 인도네시아 육해공군은 전면 침략을 시작하였고 1976년 6월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3. 현재의 상황과 문제점

가. 식민지개발론 - 사회, 경제, 문화적 권리
인도네시아정부는 합병으로 동티모르인들이 커다란 혜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투자한 액수와 설립한 학교 및 의료기관의 수, 도로포장율과 상거래허가건수 등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통계는 사람들의 고통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정부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주민의 대다수가 절대빈곤속에 살고 있는데 1975년 침공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쌀을 비롯한 곡물과 커피 등 농작물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고 가축들이 몰살당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다. 한편 동티모르인들의 문맹율은 50%이상이며 영아사망율은 세계최고수준인 1,000명당 106명을 기록할 만큼 보건의료상황도 열악하다. 주택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이 제대로 살 만한 것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업도 심각하다. 인도네시아의 가자 마다(Gadjah Mada) 대학교 연구팀의 보고에 의하면 1987년에 대학졸업자를 포함한 희망자 4,756명 가운데 3.4%인 166명만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지금까지 약 150,000명을 동티모르로 이주시키면서 공직과 상업을 이주민들이 독점함으로써 동티모르인들의 실업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주민들은 땅과 취업기회를 우선적으로 차지하면서 군부와 함께 착취계급으로 등장하고 있다.

포르투갈어와 테툼어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는 이른바 판차실라(pancasila)원칙에 따라 모든 국민에게 이슬람, 가톨릭,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5개 종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등록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신을 부정하는 자, 곧 공산주의자로 간주된다. 따라서 동티모르인들은 이제 80%이상이 가톨릭을 믿게 되었고 이주민들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군과 동티모르인 사이의 저항전선이 한편으로는 동티모르인과 이주민사이의 인종갈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종교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군당국은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인도네시아군은 지난 20년동안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였으며 산림에 불을 지르고 제초제를 광범위하게 뿌려서 많은 지역이 황폐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군은 또 주민들을 강제로 집단이주시켜 주민들이 떠난 지역과 새로 이주한 지역 모두에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기업들의 무분별한 자원개발도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군부와 연계된 PT Batara Indra Group산하의 기업들은 동티모르의 주요 생산물인 커피, 백향목, 대리석, 설탕산업을 독점하고 있으며 포르투갈당국이 소유하던 토지를 모두 차지하였다. 살해되거나 강제이주당한 주민들의 땅을 군당국과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등 외지인의 토지소유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나. 대량학살과 공포로 유지하는 식민통치
  침략과 착취는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고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우선 문제되는 것은 인도네시아군이 저지른 집단학살이다. 많은 조사결과는 1975년 인도네시아가 침략한 때부터 대규모 군사작전이 종결된 1979년 까지 최소한 200,000명이상이 사망하였다는 데 이론이 없다. 인구비율로 볼 때 이차대전 후 가장 참혹한 집단학살이라고 평가되는 이 결과는 침공후 1년반이 지난 1977년 3월까지도 Fretilin이 동티모르인구의 3분의 2를 포용하고 있었을 만큼 치열하게 전개된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것이다.

동티모르에 주둔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의 숫자는 17,000명 내지 35,000명으로 추산되는데 이처럼 많은 군인들이 주둔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인권상황을 설명해 준다. 1994년 7월 동티모르를 방문한 유엔인권위원회의 특별보고관 Bacre Waly Ndiaye는 `공포분위기'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유엔 특별보고관들과 인권단체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양상은 철저한 감시와 자의적인 체포. 구금, 체계적인 고문과 강간,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 불공정한 재판과 양심수의 구금 등이다. 독립군과 연계를 가지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의심을 받아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거나 외국 대사관에 망명을 시도하고 있다.

다. 딜리(Dili) 학살
1980년 이후에도 인도네시아군은 여러 차례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예컨대 1983년 8월 인도네시아군대는 비께께(Viqueque)시의 크라라스(Kraras)마을에서 2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군은 약 1,000명을 체포하여 30여명을 즉결처분하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1년 11월 12일 수도 딜리에서 벌어진 학살은 마침 현장에 있던 외국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반출한 비디오테이프를 통하여 전세계에 알려졌다.

당시 기대를 모았던 포르투갈의원단의 방문이 취소된 가운데 10월 28일 인도네시아군에 살해된 Sebastiao Gomes를 추모하기 위하여 산타 크루즈 묘지에 모인 군중들이 평화시위를 벌이자 인도네시아 군은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인도네시아 정부의 조사위원회는 50명정도가 사망하고 실종자와 부상자가 91명씩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CNRM은 10살의 어린이를 포함한 271명의 사망자와 6살의 어린이를 포함한 250명의 실종자명단을 밝혀내고 부상자를 382명으로 발표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유엔특별보고관 Ndiaye는 11월 12일 예정된 시위를 미리 알고 있던 보안군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사전에 계획된 군사작전으로 학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150내지 270명이 사망한 것같다면서 242명이상이 실종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인도네시아 법원은 21명의 시위가담자에게 최고 무기징역에 이르는 가혹한 형을 선고하여 보복하였다


4. 독립운동과 인권의 쟁점들

가. 독립운동의 전개과정
인도네시아의 침공이후 Fretilin의 군사조직인 Falintil(동티모르민족해방군)은 무장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의 무차별 학살과 폭격, 초토작전으로 1979년 경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투항하여 대규모 무장투쟁은 거의 소멸되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독립군은 1981년 3월 사령관이 된 Xanana Gusmao를 중심으로 조직을 재건하여 지금까지 무장투쟁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Xanana Gusmao는 1988년 12월 그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UDT와 화해하고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모베레민족저항평의회(CNRM)를 조직하였다. CNRM은 모든 민족주의 조직과 정당을 포괄한 연립정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정 정파나 이념을 대표하지 않는다. CNRM은 Falintil의 사령관, 집행위원장, 비밀전선대표로 구성되며 외교를 담당하는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를 두고 있는데 Jose Ramos-Horta가 맡고 있다.

나. 투쟁의 변화
CNRM은 군사작전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여 전략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상징인 Falintil은 200명 정도로 유지하면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저항운동과 외교활동을 통한 국제적 압력동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본 Gadjah Mada 대학교 연구팀이 "군대의 압력 때문에 심리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식민주의의 족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겠다는 절대적인 결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청년학생들의 운동은 민중의 저항의식을 고취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 효과를 거두고 있다.

Jose Ramos-Horta가 중심이 된 외교활동도 성과를 얻고 있다.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의 방해로 1982년 이후 동티모르가 국제사회의 의제에서 사라지게 된 후 각국의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연대운동을 조직하여 각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왔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부터 유엔인권위원회는 인도네시아의 인권유린을 비판하면서 특별보고관들을 파견하고 있으며 사무총장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사이의 외무장관 회담과 국내외 동티모르인들의 회담을 주선하는 등 점차 개입의 정도를 높이고 있다.

다. 쟁점과 제안들
동티모르문제의 해결책은 자결권행사를 통하여 찾을 수 밖에 없지만 당장 일어나는 인권유린을 억제하는 것도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점에 관하여 유엔의 특별보고관들과 Amnesty International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이 수많은 권고를 제시해 왔는데 공통된 내용들은 인도네시아정부가 국제인권규약과 고문방지조약 등을 비준하고 그에 맞추어 인권을 보장할 것,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할 것, 수사과정의 인권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할 것, 학살과 실종 등 중대한 인권유린의 진상을 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포로가 되어 20년 징역형을 받은 Xanana Gusmao의 석방도 시급한 과제이다.

CNRM은 자결권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동티모르인들의 주민투표(referendum)를 통하여 독립 혹은 인도네시아와 병합여부를 결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CNRM은 3단계 평화계획을 제시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이익과 체면을 존중하고 궁극적으로 화해하여 선린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제안으로 평가받는 이 계획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단계 - 신뢰형성을 목표로 하는 `인도적 단계'로서 2년 이내. 동티모르안에서 군사활동 중지; 6개월안에 인도네시아군을 1,000명으로 축소; 탱크, 헬리콥터, 전투기, 장거리포를 포함한 중화기 철거; 인도네시아 공무원을 50% 축소; UNICEF, UNDP, WHO, FAO 등 유엔전문기관 상주; 전면적인 인구조사; 군대의 언론통제폐지; 정치활동의 자유허용; 포르투갈어 교육과 문화기관 설립; 유엔사무총장의 지역 대표자 선임 등의 조치가 이루어진다.
* 제2단계 - `자치기간'으로 5년 내지 10년. 모든 정당 합법화; 유럽연합의 사절단주재; 유엔이 지원. 감시하고 동티모르인들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는 지역의회 선거; 의회가 5년임기 총독선출; 외국과 무역관계를 수립, 투자, 토지소유권, 재산관계 및 출입국에 관한 법률제정; 인도네시아군의 철수;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유엔이 훈련하여 총독이 지휘하는 경찰을 가짐; 인도네시아 공무원의 추가감축;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관계정상화.
* 제3단계 - 자결권행사. 모든 당사자들이 원할 때에 즉시 유엔 감시하에 주민투포 실시하여 독립 또는 인도네시아와 통합여부 결정.


5. 국제사회와 동티모르

가. 국제사회의 공모와 이해관계
동티모르 문제는 국제적인 맥락속에서 일어났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1974년을 전후하여 베트남을 시작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순으로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었다. 유럽에서는 좌익군부의 혁명으로 포르투갈의 파시스트정권이 무너졌고 그 여파로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독립하여 좌익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티모르섬 북쪽해협은 미국의 핵잠수함들이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로 티모르섬 북쪽 해협을 이용하는 데 군사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티모르남쪽 대륙붕에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눈독을 들인 호주에게 민족주의적인 Fretilin은 곧 공산주의세력으로 보였다. 더구나 비동맹권의 지도국으로 남아시아 최대의 정치, 경제, 군사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서방국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동반자였다.

이런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1974년 호주수상 휘틀람으로부터 동티모르를 병합하는 데 동의를 얻은 인도네시아는 1995년 12월 5일 포드 미국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방문하고 떠난 직후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때 사용된 무기의 90%가 미국이 공급한 것이었으며 미국은 그후에도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무기를 원조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밖에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를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수출하여 이익을 얻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진상을 은폐하는 데 협조해 왔다. 군수산업이 취약하여 혼자만의 힘으로는 동티모르를 병합할 능력이 없던 인도네시아의 배경에는 이러한 국제적 공모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 민족자결권과 반인도적 전쟁범죄
국제법의 기본원칙은 민족자결권의 보장이다. 유엔헌장과 국제인권규약을 비롯하한 국제법규는 민족자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유엔에서 아직 자결권을 행사하지 못한 지역으로 인정받은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가 병합한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불법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인도네시아군대의 철수와 동티모르의 자결권존중을 요구한 2번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8번의 총회결의는 여전히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한편 침공후 인도네시아군대가 저지른 학살과 인권유린은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로서 모든 나라는 그 범죄를 처벌하고 예방하며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협조할 의무를 지고 있다.

다. 인도네시아의 국내정치적 맥락
동티모르문제는 인도네시아의 국내정치상황과 맞물려 있다. 수하르토정권이 처음으로 야당의 도전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학생운동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은 점차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 동티모르의 독립이 다른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운동을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정권내부의 두려움도 있는데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동티모르를 지배함으로써 군사훈련과 승진, 그리고 경제적 착취의 이익을 얻는 부패한 군부의 이해관계이다.

수하르토 사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권력투쟁과 혼란은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는 물론 동티모르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체제가 민주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동티모르문제 해결에 가장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단기적으로 큰 위험을 불러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예컨대, 수하르토 사후에 민중의 불만이 제일 먼저 폭발할 곳이 바로 동티모르인데 이때 인도네시아군부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예상하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사회의 몫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6.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그리고 한국

동티모르는 우리나라의 고난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것이 고통의 출발점이라는 점은 물론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냉전을 배경으로 한 강대국의 패권정치에 휘말려 노예상황으로 전락한 것 역시 낯설지 않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부패한 군사정권의 인권유린과 이에 저항하는 끈질긴 투쟁 역시 닮았다. 동티모르는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적 원칙을 통하여 인권을 존중하면서 찢어진 사회를 재건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과 호주, 인도네시아의 패권정치속에서 독립과 안정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두는 그대로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들이다. 한편 인도네시아는 과연 민주화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어떤 내용을 채워 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좌절하고 말 것인가. 이 또한 민주화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와 반성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의 정부와 기업은 인도네시아에 무시할 수 없는 이해관계와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당사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적 발전을 향한 갈림길에 서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제사회와 그 경험을 나누고 역량에 걸맞는 기여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 동티모르 문제는 우리와 우리나라가 어떤 도덕적 가치와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것인가를 돌이켜보고 선택해야 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잊어버린 채 눈앞의 이익을 앞세워 독재정권의 범죄를 방조하며 약소민족의 고통에 눈감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자결권을 존중하고 인권과 평화에 기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열쇠가 동티모르문제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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