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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영원히 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라!
icon 관리자
icon 2002-05-10 12:25:31  |   icon 조회: 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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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라!


여상화(희생자 여정남씨 질녀)


사람들은 묻는다. "삼촌하고 참 가까웠나 보죠?" "...아, 예, 제가 큰 형님의 딸이니까, 제가 여자 중에서는 제일 크니까..." 이렇게 두서없이 얘기하다가 나는 중간에서 그 분이 왜 그 얘기를 하는지 문득 깨닫고 갑자가 할 말이 없어진다.


그 이름대로 살다간 나의 삼촌 여정남
나의 삼촌 여정남. 바른 남자. 그 이름대로 살다 가셨다. 사시는 동안 내내 횡단보도의 파란 신호등을 보고 건너다가 신호를 무시하고 미친듯이 달려들던 중앙정보부라는 차에 치어 돌아가셨다. 아내도 없이, 자식도 없이, 쓸쓸한 느낌. 내가 삼촌을 챙기는 건 당연하다. 나는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분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겐 참 아픔으로 남아 있다. 내가 어렸기 때문에 삼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했던 것. 하기사 알았다해도 어차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하는 것으로 그나마 나 자신을 위로해 보는 수 밖에.

살아가다 가끔씩 비집고 들어오는 삼촌에 대한 그리움들. 아니 애절함들이다. 키가 참 커다랗고 인자한 분이셨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나는 할머니 옆에서 자지 않고 삼촌 옆에서 잤다. 마루에서 커다란 모기장을 치고... 잠이 들면.

아침에 잠에서 깨면 삼촌은 마당을 쓸고 계셨다. 그리고 다른 거 다 차치하고 어린 마음에도 삼촌은 참 인내심이 있었다. 생각나는 것. 어느 날 삼촌이 식사를 하시는데 할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는데 할머니의 그날 잔소리는 삼촌이 밥상을 물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삼촌 소화 안 되겠다. 제발 할머니가 그만 했으면' 하는 생각에 원망스러운 눈으로 할머니와 삼촌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삼촌은 '어무이 이제 그만 하시이소' 소리도 않고 그냥 '예, 예' 하며 끝까지 밥을 다 드시고 수저를 놓으셨다.

또 하나,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재판정에 갔다가 엄마가 "삼촌 불러 봐." 하시고 "아지야" 부르면 뒤돌아보고 '씩' 웃어 주신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웃는 삼촌의 모습이 그저 좋았다. 환한 삼촌 얼굴이.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시험을 치기 전 날. 우리집에 오셨댔다. "시험 잘치고 건강하그래이. 그리고 이걸로 엿 사묵어라. 내가 못 사왔다 아이가..." 하시며 돈을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시고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였을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오랜만에 본 삼촌 때문에 반갑고 좋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나와의 마지막이었다. 우리 가족과의 마지막이었다.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삼촌
그리고 얼마 후에 나는 이제 신문에서 삼촌을 보게 되었다. 삼촌은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죽음'을 선고받고 있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려고. 저들도 우리들보고 정치적인 문제니까 쬐끔만 참아 달라고 했는데. 그리고 변호사도 그랬고, 중정사람들도 데모만 진압되고 사회가 조용해지면 남편들 돌아옵니다. 그때 맛있는 거 많이 해서 남편들 대접이나 잘 하소 했는데, 안심하라고 했는데...'

다른 모든 가족들이 그랬듯이 우리 가족도 아무도 삼촌이 죽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도 빨리. 착하기만 한 삼촌이 아무리 데모를 많이 했다해도 설마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기야 하려고... 하지만 삼촌은 죽어서 돌아 왔다. 이제 모든 게 끝이었다. 독재자가 각본도 없이 마음대로 극을 연출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주인공들을 없애버린 것이다. 더구나 한꺼번에 여덟 명을 무 자르듯. 아주 예민한 사람들조차 미처 그 복선을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삼촌의 죽음이 나에게는 사회적 의미고 윤리적 의미고 역사적 의미고 상관없이 그저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오빠와 나를 앉혀 놓고 삼촌의 죽음을 너무나 담담하게 알려주시던 아버님을 생각하면. 그때 오빠와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였다. 나는 그 길로 교회에 달려갔다.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나는 무지하게 울었다. 그때는 슬프다는 느낌보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집에 남은 오빠는 어땠을까? 오빠는 욕 해댈 하느님도 없었는데...'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내가 죽기 전에 정남이의 누명을 벗겨야 하는데 불쌍한 놈... 부탁한다... 힘들겠지만 미안하구나.' 말씀하시던 눈빛.

나는 삼촌의 죽음으로 아니 같이 돌아가신 여덟 분의 죽음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고뇌했다. 그 고통은 오래 갔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장면, 어떤 책에서든 무시로 튀어나와 나를 흔들었다. 김근태 선생님의 '남영동에서'를 읽으면서도 그랬고 얼마전 텔레비젼의 드라마 '최수종 교수형 장면'에서도 그 분들의 죽음이 겹쳐졌다. 사람은 하늘이라 했는데...

내가 이렇게 삼촌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의 부인들과 자식들을 생각하면 난 입이 열개라도 그 입을 닫아야 할게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나무에 묶어 놓고
1974년 4월 18일 연행된 이수병 선생님의 부인은 어린 딸애를 들쳐업고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교도소 앞을 서성였다. 하재완 선생님 댁, 동네 할머니가 빨리 나가 보라고 전화를 해서 나갔더니 당시 7살 어린아이에 불과하던 아들을 동네 꼬마들이 끌어내어 목에 새끼줄을 매어 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한다고 하면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러한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저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팔짱끼고, "그 당시 경찰관들도 그 꼴 다 봤어요. 그걸 본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또 초등학교 2학년이던 큰아들은 소풍을 가서 점심을 먹는데 애들이 너희 아버지 간첩이지 하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어서 애가 못먹고 피해다니고 울면서 집에 왔어요."

그 뿐이 아니다. 남편들의 억울함과 무죄를 확신하고 이 사건이 박정권에 의한 조작극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애쓰던 부인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 벌이던 기독교회관 농성에서조차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남편의 석방을 눈물로 호소하며 백방으로 뛰어 다니던 부인들은 거의 전부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되어, 육체적 정신적 폭행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약물을 먹여 성적 흥분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등 정보부가 벌인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인들은 '다시는 구명 운동을 안하겠다.' '신구교에서 개최하는 기도회에 나가지 않겠다.' 혹은 '내 남편은 간첩이다'라는 진술서를 쓰고 서명할 것을 강요 받았다. 부인들은 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자신들이 쓴 진술서가 남편의 신상에 영향을 줄 것에 가책을 느껴 사제단에 양심선언을 써 맡겨 놓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사람 사는 꼴인가
김용원 선생님 부인은 당시 32세의 젊은 분이셨다. 큰 애가 5세, 작은 애는 2,3세였는데 몇날 며칠을 버티다가 아이들이 밥 달라고, 젖 달라고 우는 소리가 귀에 쟁쟁해서 써 주고 나왔는데 '도대체 이게 사람 사는 꼴인가'며 실망감, 좌절감,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쥐약을 사놓고 일가족 자살을 기도하였다. 때마침 찾아온 친정 어머니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내가 아무래도 너보다 먼저 죽어야 할까 보다'라고 말하며 눈물짓던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한달 후에 돌아가셨다.

이외에도 가족들이 겪은 고통들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붙들려 간 도예종 선생님이 고문에 의해 협심증에 걸려 수 차례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 중정에서 고맙게도 약까지 사먹였대도, 하재완 선생님이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고 항문이 빠지고 귀가 먹었대도.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법정에서 문호식 검사가 '덜 맞아서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나중에 더 때려주지.' 소리치는 것을 들었어도. 영치금 넣고 찾은 이만큼 끊긴 내복과 피묻은 속옷바지, 그것도 물 한번 끼얹은 속옷바지를 봤어도, 재판 때도 피고들이 한 마디라도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혀가 나오도록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어도, 육군 대위 출신의 건강한 우홍선 선생님이 구속 4일 만에 상처로 인하여 사지를 쓸 수 없어 누워도 좋다는 '와허증'을 받았대도.


'설마 죽이랴' 생각했지만
'힘들어도 힘들어도 이것으로 끝이겠지' 견디며 버텼다. 모두들 그랬다. 가족들도 신부님들도 이 미친 바람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참말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지금껏 얼굴 한번, 얘기 한번 제대로 못 나눠 봤습니다."

하지만 "사형!" 4월 8일 대법원 확정판결. 그래도 모두들 '설마 죽이랴' 했다. "저들도 정치적 문제니까... 별일 없을 거라 했으니까..."

"재판 과정에서 싱긋이 웃는 모습이 너무 평화롭고 멋지게 웃더라고요. 뒤를 돌아보면서 웃는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서 걱정도 안했다." 그리고 부인들은 성당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힘을 주고 있었다.

"기다렸어요. 잘 들 오셨어요. 다시 한번 힘을 냅시다. 무슨 일을 못하겠어요"

"대법원 원심이 확정됐으니 어쩌면 면회가 허용될 지도 몰라요. 전 남편 면회 한번만 해도 원이 없겠어요. 그 동안 소식 한번 듣지도 못했고 재판정에서 겨우 뒷모습만 보다니."

"또 그러시네요. 교도관들도 그랬잖아요. 울부짖지만 말고 빨리 탄원서를 쓰라구요. 그리고 재심을 청구해야지요. 민청학련 학생들도 다 풀려났는데 우리 남편들이라고 이대로 사형을 당하겠어요. 자 신부님 만나 뵙고 대책을 세우도록 해요. 힘들 냅시다."

그리고 그날 밤 가족들은 기도하듯 탄원서를 써 내려갔다. "우리들은 살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부디 남편을 정치 제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눈물과 통곡, 비탄의 바다
그날 밤 김용원 선생님은 - 평소에 선생님은 자기 물을 잡범들에게 양보하고, 잡범들은 칭찬. 조용하고..., 인자하고 - 대법원 판결 났던 그날 신변 정리를 하시면서 소지품과 책을 집에 보낼 것, 안에 있는 사람 줄 것으로 정리하시고 '물은 오늘 대신 내가 써야겠다' 하시고 한 말 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몸 닦고 내의 갈아 입어, 설마 선생님 같은 분을 죽일까요? 마음 편히 잘 주무십시오' 다음날 기상시간 6시. 그날 따라 조용했다. 7시가 되도 밥 줄 생각도 않고. 9시가 다 되어 인기척. "새벽에 처형했다." 나가시면서 유인태씨 방을 거쳐 나가시는데 발자국 소리가 나면 유인태씨가 잠에서 깰까봐 일부러 창문 쪽으로 바짝 붙어서 걸어나가셨다.

'잠든 사람, 잠이 깰까봐...'

1975년 4월 9일 새벽. 사형장으로 향하는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23년이 지난 오늘 새벽. 다시 천둥 번개 소리보다 더 크게 마음을 친다. 그리고 찢어 놓는다.

"여보세요." "고모 글쎄 오늘 아침 뉴스에..."

1975년 4월 9일 아침. 서대문 구치소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그야말로 눈물과 통곡, 그리고 바탄의 바다였다. 대법원 판결이 내린 바로 다음날 새벽 4시부터 같은 사건의 관계자 8명이 잇따라 처형된 경우는 아마도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가족들은 모두들 넋이 빠진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느님 아버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떻게 여덟 생명 앗아갈 수 있나. 뉴스 듣고, 여덟 사람 소식 듣고, 가족들 꿈이길 바라, 정말 꿈이길 바랬으나 두 눈으로 보고 정말인 줄 알았다."

"신부님들 안죽을 거라 하더니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 안 죽는다더니만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 하고 신부님들의 옷깃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유언 조작. 포크레인까지 동원된 시체 인수 과정의 그 희비극적인 작태들. 소위 인혁당 신부라고 불리시던 문정현 신부님은 시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차라리 나를 깔고 가라"시며 길바닥에 드러누우시고. 영구차는 경찰차의 호위(?)아래 강제로 화장터로 향하고. 겨우 빼앗아 온 시신에는 끔찍한 고문 흔적, 흔적들. 그러나 세상은 다시 잠잠해졌다. 가끔 시도는 있었을 뿐.


그러나 세상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듣기에도 어마어마한 죄명들에 묶여 감옥에 끌려가고 또 풀려나고 사면되고 복권되고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 같은 법의 유희를, 변화무쌍한 이 세태를 우리 유족들은 가슴 아파하며 또 너무 부러워서 피눈물에 얼룩진 가슴으로 바라보며 살아왔다.

'평소에 아는 사람 스무명만 대라 해서 고문에 의해 횡설수설해서 피해 당한 사람 생각하면 괴로워서 잠도 안온다.' 하재완 선생님.

'중정에서 누군가는 한사람을 희생시킬 것 같다. 그러면 내가 될 것 같다. 중정에서는 도예종씨를 수괴로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아무 것도 안한 걸 내가 아는데, 내가 수괴로 되는 게 인간적 도리가 아닌가 싶다.' 서도원 선생님.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여덟 명이었다.

'미안합니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배후조정이라고 해 가지고 학생운동 망쳐먹은 일에 동원이 돼서' 이수병 선생님.

나는 돌아가신 여덟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수 없다. 책 속에서, 가족들 속에서, 아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만난 그 분들은 모두 여리고 맑고 깨끗한 품성을 가지셨고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신 분들이셨다.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누구보다도 애쓰며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이셨다.


죽인다고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 사회적 관계가 그리 없었기에
이제 나는 감히 세칭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정변을 일으킨 후 유신체제에 대한 극렬한 저항이 폭발하자 긴급조치만으로는 모자란다는 판단하에, 마음먹고 인혁당이라는 사건을 고문으로 조작, 유신 반대투쟁의 예봉을 꺽으려는 정치적 음모에 희생된 사람들. 또 그것이 재판과 요식절차를 거쳐 독재권력이 어느 만큼 잔악무도한 지를 세계 만방에 극렬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 사회적 관계가 그리 없었다는 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유의 전부였다. 나는 적어도 오늘에 이르러 그 분들 모두의 복권이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 머지 않아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는 가족들의 믿음 위에서 이 글을 마무리지려 한다.

지난 날에 있었던 억울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이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으로 그 시대를 살아남은 우리들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힘에 의하여 묻혀지고,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외면되고 가리어진 이 사건을 이제 밝은 빛 속으로 드러내는 일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그 날 버드나무 하얀 가루가 많이 날리던 날이었다. 내 그 날 기억해요. 내가 사형장 가까이 있는 사방에 있었거든요, 참혹하지요"

"돌아 오라 그대들. 온몸에 두껍게 칠해진 붉은 물, 부르르 털고 다시 살아 영원히 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어라!"
2002-05-10 1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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