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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인혁당 사형수 8인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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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2:33:42  |   icon 조회: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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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형수 8인의 진실

어느 교도관이 본 정치범들


전병용(전교도관)

'오는 4월 9일은 그들이 그렇게 죽어간지 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날에 있었던 단순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이들을 기억하고, 또 무대에 올려 상연하는 것만으로 그 시대를 구차하게 살아남은 우리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정치권력의 강요에 따라 묻혀지고, 역사 속에서도 철저하게 가려진 이 사건을 밝은 빛 속으로 드러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소설보다 가혹한 현실




저 풍선을 타고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찬이는 생각했다. 이 쪽은 혼잔데, 저 쪽은 다섯명이었다. 다섯 명 가운데 한 아이만은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내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뭐라고 말 좀 해."

3학년 짜리가 찬이의 이마를 쿡 찔렀다.

"니네 아빠는 간첩이지, 그래서 잡혀간 거야. 그렇지?"

"아니야. 간첩이 아니야."

찬이는 힘껏 항변했다. 아까부터 벌써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럼 왜 감옥에 들어갔지?"

"우리 아빠는 옳은 말을 했어."

"뭐? 간첩이 옳다고? 애들아, 이 자식은 역시 간첩의 자식이라서 말하는 게 달라."

"난 간첩 자식이 아니라니까."

찬이는 끈기있게 대꾸했다. 다른 아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럼 누구 자식이야?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냐?"

"아니야. 나는 아빠 엄마 자식이야."

"그것 봐. 역시 간첩 자식이잖아. 간첩은 이렇게 목을 졸라 죽인대."

그 아니는 느닷없이 숨겨 갖고 있던 노끈을 꺼내어, 찬이의 목에 걸고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만둬. 나 화낼 거야!"

찬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목에 감긴 노끈을 손으로 눌렀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찬이의 동급생 아이가 노끈을 쥐고 있는 아이를 말렸다.

"그만둬. 이런 짓은 싫다고 했잖아."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빨갱이 자식은 십자가에 매달아야 돼. 너도 이리 와서 거들어."

인용이 좀 길었지만, 위의 글은 재일 교포 작가인 이회성씨의 장편소설 『금단의 땅』에서 빌려온 것이다. '찬이'는 작중의 주인공이며 4·19세대인 젊은 혁명가 박채호의 외아들이고, 인용 부분은 박채호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된 직후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장면의 일부분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더러는, 아무리 소설이지만 어쩌면 상상력이 너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산이다. 아니,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은 항상 소설보다도 가혹하다.

1975년 4월 9일 새벽,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당한 여덟 사람 중의 한 사람. 그의 어린 아들들이 겪었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쩐지 처참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기 전후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의 아들을 동네 꼬마들이 끌어내어, 목에 새끼줄을 매어 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한다고 하면서 놀이를 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러한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 아이는 소풍을 가서 점심을 먹는데 다른 급우들이 돌을 던지는 바람에 밥도 먹지 못하고 결국 한쪽 가장자리의 나무 뒤에 숨어서 겨우 먹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남편들의 억울함과 무죄를 확신하고, 이 사건이 박정권에 의한 조작극이라는 사실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애쓰던 부인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구속자가족협의회에서 벌이던 기독교회관 농성에조차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남편의 석방을 눈물로 호소하며 백방으로 뛰어 다니던 그 분들은 거의 전부 중앙정보부로 강제 연행되어, 육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약물을 먹여 성적 흥분상태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며 희희낙낙 하는 등 정보부가 자행한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분들은, "다시 구명운동을 안하겠다", "신·구교회에서 개최하는 기도회에 나가지 않겠다" 혹은 "내 남편은 간첩이다"라는 진술서를 쓰고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부인들은 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자신들이 쓴 진술서가 남편의 신상에 영향을 줄 것에 가책을 느껴 사제단에게 양심 선언을 써서 맡겨놓기도 했다. 이들 중 어떤 부인은 중정에서 풀려나온 후, 남편을 볼 면목이 없다하여 쥐약을 사놓고 일가족 자살을 기도한 바 있다. 때마침 찾아온 친정 어머니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지만, "내가 아무래도 너보다 먼저 죽어야 할까 보다"라고 말하며 눈물짓던 어머니는 그때의 충격으로 1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전형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외에도 가족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사자들은 어떠했겠는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무렵 이미 인혁당사건 관계자들의 몸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뼁끼통(감방 속의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다" "하재완이 누굽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더"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아항, 그래요!" 사상 15방에 있던 나와 사하 17방에 있던 하재완씨 사이의 통방(通房, 재소자들의 창을 통해서 서로 큰소리로 교도관 몰래 대화하는 짓)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 하고 하시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 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 달라고 합니더"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아항, 그래요!"


그 자신 소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감되어 있던 시인 김지하씨가 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직후, 2월 25, 26, 27일자 『동아일보』에 「고행…1974」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위의 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인혁당 관계자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무자비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도예종·하재완·서도원·송상진씨 등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두가지 이상의 질병을 갖고 있었고, 제대로 걷거나 심지어는 바른 자세로 앉아있지도 못했다. 그들의 몸 구석구석은 전기고문의 흔적으로 시커멓게 타 있었고, 구타로 인한 피멍자욱은 일일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중에서도 하재완씨가 제일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어 있었고, 물고문에 의한 폐농양증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배어 나왔다.

지금도 나는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모두들 맑고 깨끗한 품성의 소유자들이었고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수병씨는 수감 중에도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었다. 그는 징역을 살면서도 1분 1초를 아껴 성실하게 생활했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독어·일어·불어 등의 외국어에 모두 능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그는 약간은 초조한 모습이었다.

"전형,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바깥에선 뭐라고들 그럽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대충 그러다가 감형조치 하겠지요."

"글쎄, 아무래도……"

"아, 세상 사람들 눈이 있고, 여론이 있는데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겠어요? 바깥에서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얘기가 나오고 있고… 하늘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

이수병씨에 대한 나의 위로는 어느 정도는 나 자신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철없이 순진했던 생각은 박정권의 무자비한 망나니 놀음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법원에 상고가 기각된 바로 그 다음날 새벽 4시부터 전격적으로 집행된 인혁당사건 관계자 8명에 대한 처형은 내가 아침 출근을 위해 구치소의 정문을 들어설 즈음에는 이미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

이런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는 곤혹스러움 주의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을 형사사건 바라보는 시각으로 관찰, 기술하면서 생기는 답답함이다. 여덟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혁당사건' 자체는 틀림없이 조작에 의해 들씌워진 허황한 굴레에 불과하지만, 사건의 형사적인 조작이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자칫 잊혀지기 쉬운 것이다. 얼마 전에 공연된 연극 '4월 9일'이나 각종의 월간지에 실린 인혁당 관계 기사들은 형사사건의 조작성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분들의 '삶의 모습'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조차 않는 그러한 문제점 때문에 일정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소위 '인혁당 사건'의 역사적인 평가는, 내 모자란 능력을 생각해볼 때, 터무니없이 벅찬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진행되면서 그러한 함정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될지라도 너그럽게 이해하여 읽어주기를 바라며, 미리 변명을 해두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세간에 알려진 인혁당사건은 1차와 2차로 나뉘어져 있다. 1964년 봄 갓 출범한 박정권이 대일(對日) 굴욕외교를 통해 한일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하고 있을 때, 이를 반대하는 거센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 6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6·3사태) 박정권은 곧이어 (8·14) 민중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른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 발표한다. 이러한 수법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수법으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그 시초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당초 이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의 공안부 검사들은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허구하고 주장하며 기소를 거부했고,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압력을 행사해서 사건의 수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검사를 시켜 기소장에 서명토록 한다. 이와 같이 우여곡절 끝에 기소를 완료한 검찰은 처음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되어 있던 공소장을 반공법 위반으로 혐의를 바꾸어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재판결과는 주모자로 기소된 도예종에게 징역 3년, 그외 양춘우 등 6명에게 각각 징역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보잘것이 없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 출범 이후 첫 작품이 실패로 끝난데 대한 불만으로 정보부의 칼날은 언제나 이들을 향해 번뜩이고 있었고 이는 어쨌든 앞으로 있을 비극의 단초를 예고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1974년, 박정권의 소위 유신독재가 출범한지 두해째 되는 해에는 다시 한번 민중들의 가열찬 반독재투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박정권은 '대한민국의 헌법(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라고 시작되는 긴급조치 제1호를 선포하였고, 뒤이어 학생들의 시위현장에 뿌려진 유인물에 등장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후에 재판과정에서 이 명칭은 유인물에 그저 평의상 붙인 호칭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를 겨냥, 민청학련과 관계된 일체의 행동을 금지한다는 긴급조지 제4호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런 긴급조치만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권은 1차적으로 김지하·김동길·유근일·이현배 씨 등을 엮어 학생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조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단하려 했지만, 이러한 구상이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자, 인혁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용공배후조직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그 죄상을 확대포장하여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비교적 결속력이 약한 분야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대국민 지명도가 낮은 사람들을 골라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대구와 서울에서 영문도 모르는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그렇기 때문에 한꺼번에 싸잡아서 발표했던 이 전대미문의 정치사건에 대한 재판은 '인혁당재건위' 관계 피의자들과 '학원' 관계 피의자들로 나뉘어져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윤보선·지학순·김동길·김지하·김찬국 씨 등 각계의 명망가들이 관련된 학원관계자들과,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이수병 씨 등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중요한 사회적 지위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한 과거 혁신계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을 따로 분리해서 재판을 진행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후에 전개될 이들 양쪽 피의자 그룹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

결과부터 이야기한다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서도원을 비롯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무기징역이 7명, 징역 20명이 4명, 징역 15년 4명 등 관계자 전원이 징역 15년에서 사형에 이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학원관계자들은 비록 처음에는 일부가 사형을 받았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혁당 관계 인사들에 비하면, 특히 실제로 징역을 살은 형량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학원관계자들은 1975년 2월 15일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이강철씨 등 4명을 제외한 1백 48명 전원이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같은 해 4월 9일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1982년 3월 석방될 때까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4월 9일의 희생자 8명의 이름과 간단한 신상은 다음과 같다.

서도원(52. 무직. 전 대구 매일 신문기자), 도예종(51. 삼화토건 회장), 하재완(43. 양조장 경영), 이수병(37. 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 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46. 양봉업), 여정남(31. 무직. 전 경북대 학생회장)




사건의 조작과 엉터리 재판


한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은 1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제 1차와 2차의 인혁당사건에 공통으로 깊숙히 관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74년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던 신직수 중정부장은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수사를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이용택 중정6국장은 1차사건 당시 5국의 대공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일선에서 수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74년의 경우에는 대구 중정지부에서 근무 중이던 신모·손모라고 하는 수사관을 서울의 본부로 차출하면서까지, 4·19 이후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혁신운동의 중심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그림에 의하면 인혁당의 중심인물인 도예종·하재완·서도원씨 등이 경북대 졸업생인 여정남을 포섭하여 민청학련을 조직,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시나리오였지만 이러한 주장은 재판과정을 통해 완전히 부정되었다.

경북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이강철씨는 법정에서,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고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증언했으며, 민청학련 주동자로 알려진 이 철(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3년)씨는, "민청학련 운동이 인혁당의 조종을 받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거의 매일 접하는 인혁당 관계자들의 모습과 말을 통해서,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75년 2월 24일 발표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서를 통해서 그 생생한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예종: 4월 20일에서 25일까지 철야조사를 받았고 그후 검사취조 때도 내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수십 차에 걸쳐 심장병인 협심증까지 일으켜 드디어는 수차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검사에게 중앙정보부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면 취조를 못하겠다고 거부했으며, 검사에게 부인하면 즉시 중앙정보부로 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도예종의 상고이유서).

하재완: 무조건 아는 사람의 이름을 20명만 대라고 하여 정신없이 횡설수설한 것을 기록하여 진술서 내용도 보이지 않고, 강제로 타의에 의해 지장을 찍게 하였다. 그리하여 죄없는 사람을 불러진 대로 잡아들여 15∼20년형을 받게 했으니 괴로워 잠도 오지 않고 미칠지경이다(하재완의 재판정 진술).

우홍선: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돌리면(전기고문)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고문하는 수사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우홍선의 법정진술).

전창일: 며칠 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 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온몸을 쥐어짜는 전기고문을 하여 몇 번씩 실신케 하였으며, 검찰에 넘어와서도 절대로 무죄라고 주장하니까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다. 4인 지도부란 말도 정보부에서 만든 말이며 다방에서 두어번 공사하청 관계상 또는 우연히 만나 담소한 것이 어떻게 국가변란 모의라고 할 수 있는가(전창일의 법정진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작성된 조서를 근거로 해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은 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서 구성된 비상군법회의의 공판정에서 열렸는데 재판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피고인들의 가족에게까지도 방청이 극히 제한된 비공개 비밀재판이었고, 재판정은 무장한 헌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살벌한 분위기였다. 변호사의 반대심문이나 피고인들의 자기변호가 검사나 판사들의 강압적인 태도와 발언에 의해서 빈번히 제지당했으며, 증인신청이나 증거물 보전 신청 등이 모두 기각당했다.




날조된 공판조서


심지어 임구호씨의 경우 최후진술을 통해, "오늘의 이 재판을 나의 교육장으로 삼아 앞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데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라고 이야기 했다가, 재판이 끝난 후 따로 찝차에 실려 끌려가서는 당시 담당 검사인 문호철검사가 배석한 자리에서 군경찰관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가장 공정했어야 할 재판정에서 조차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몸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김종길 변호사는 "우홍선의 증거로는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가질 수 있는 라디오, 그나마 다이알이 FM에 돌려진 채 있는 라디오 한 대 뿐이다. 고문과 억압적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수사관의 요구대로 진술한 피의자 진술조서, 자술서 등을 유죄의 유일한 증거로 함은 채증법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심리 또한 미진하여 마땅히 파기되어야 한다. 특히, 김한덕·전창일이 공산주의자라면 변호사직을 내놓아도 좋다"라고 변론하였고, 함정호 변호사는, "증인채택도 기각시키고 증거물도 압수해 가버린 이런 재판정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변호사로서 이런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피고인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피고인들은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통해서 이 사건을 대하는 자신들의 시각을 간명하게 표현했다.


도예종: 내가 왜, 이 자리에 어떻게 서게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유홍선: 중앙정보부에 심문을 받으러 갈 때 나를 태운 차가 교통위반을 하고 마구 달렸다. 나는 횡단보도의 파랑불을 보고 길을 건너가다가, 내가 타고 달렸던 중앙정보부의 차처럼 교통위반을 하며 달려오는 차에 치인 듯한 기분이다.

유진곤: 나는 80년대 수출목표를 달성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젊은 기업인의 장래를 막지 말아라.

김한덕: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있다면 연행되기 전날 유진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저질러진 가장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아마도 공판조서를 날조해서 작성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판조서라는 것은 재판정에서 오고간 대화를 실제와 똑같이 기록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인 바 이것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이수병씨의 공판조서 중 408쪽을 보면, "피고인 등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고 대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판기록에는, "네, 혁신제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조직 구성한 활동상황을 조정한다 등을 합의하였읍니다"로 되어 있다. 이는 가족들이 방청과정에서 분명히 들은 것이며 이어서 행한 질문, "피고인 등 4인 지도부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시로 정하고 지도위원에 도예종·서도원을 추대하였다는데 사실인가"에 대하여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진술했는데,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한 13명의 대법원 판사들이 날조된 공판조서를 근거로 하여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이유없다고 기각하는 판단을 내린 것은 중대한 오류였음이 분명하다.




시체마저 빼앗기다


사건관계자의 가족들에 의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계속되어오던 구명운동은 마침내 신·구교를 비롯한 종교계와 재야의 일각에서 약간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혁당사건의 고문 조작설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언명한 사람은 그러나, 조지 오글 목사나 제임스 시노트 신부등 외국의 종교인들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박정권에 의해 한국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만다.

1975년 2월 24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구속자가족협의회 위원회가 '인혁당 사건 진상조사를 제의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발표, 관계기관과 성직자 그리고 재야인사 공동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재판을 공개적으로 진행할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한편,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바 있는 시인 김지하는 앞서 얘기한 옥중기 '고행…1974'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극적으로 인혁당사건의 고문·조작 사실을 사회에 알렸다. 그 일로 인하여 석방 27일 만에 다시 반공법 위반의 혐의로 수감된 김지하는 인혁당사건의 8인 희생자의 처형이 집행된 지 한 달쯤 뒤에 옥중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양심선언'을 집필하여 다시 한번 인혁당사건의 희생자들이 무고한 분들이라는 것을 호소한다. 김지하의 양심선언이 반출되어 발표되기까지는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깊숙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 '양심선언'속에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 김지하의 인혁당 사건에 대한 확신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혁당 사람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확신이다. 중앙정보부란 어떤 곳인가? 학생들, 야당국회원의원들은 물론이요 최근에는 공화당 원내 총무라는 사람까지도 고문을 받은 일이 있노라고 폭로한 그런 곳이다. 그러한 중앙정보부에서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려한 '인혁당' 사람들이 고문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논리적' 심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 사람이 되겠는가?

그러한 나의 확신을 나는 그것도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실에만 국한하여 표현한 것뿐이다. '인혁당'이 과연 반국가단체인가, 아닌가? '인혁당'이라는 것은 과연 실체가 있었던 것인가, 도깨배인가? 나는 아직도 이 의문에 관한 박정권의 선전을 절대로 그대로는 믿지 않는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려면, 그리고 내가 거짓으로 고문설을 퍼뜨렸다고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려면, 박정권은 이미 처형된 8명을 되살려 놓든가, 하재완, 이수병의 혼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재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1975년 4월 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 앞의 조그마한 공간은 그야말로 눈물과 통곡과 그리고 한탄의 바다였다. 얼마되지 않은 교도관으로서의 경험이었지만, 대법원 판결이 내린 바로 다음날 새벽 4시부터 같은 사건의 관계자 8명이 잇따라 처형된 경우는 아마도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가족들은 모두들 넋이 빠진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신부님들의 옷깃을 부여잡고, "신부님들 안죽을거라 하더니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 안죽는다더니만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하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구씩 인도되었고, 그나마 집이 지방에 있는 가족들은 미사라도 드리고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신들을 당시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던 응암동 성당에 안치시키려고 했으나, 경찰은 이들의 마지막 소원마저도 묵살하고 8구의 시신을 완력으로 탈취하여 각각 그들이 설정한 장지로 견인해 갔다.

마지막으로 송상진씨의 시신을 실은 차가 밀고 밀리는 실갱이 끝에 응암동 성당으로 향해 얼마쯤 가고 있을 때 녹번동 3거리에서 또 다시 3, 4백명의 경찰병력이 이들을 막아섰다. 2, 30명에 불과했던 가족 측의 사람들은 시체를 태운 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차바퀴 밑으로 기어들어가 드러누워가면서까지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시체를 태운 차는 크레인에 견인되어 밑에 있던 사람의 몸을 타넘고 벽제 화장터로 끌려갔으며, 시체는 그곳에서 가족들의 확인도 없이 화장되고 말았다. 당시에 차바퀴 밑에 깔려 다리를 다치신 문정현 신부는 지금까지도 다친 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참으로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박정권의 천인공노할 만행은 산 자에게 뿐만 아니라 죽은 자에게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죽은 몸, 산 정신


글을 마무리 하면서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로서는 8인 희생자를 비롯한 인혁당 사건 관계자 여러분들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하고 또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혁당이라는 조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허울을 뒤집어쓰고 희생당한 사건 관계자들이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는 것도 또한 변함없는 나의 확신이다.

희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물론 4·19 직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혁신계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 학생연맹' 등과 진보적 색채의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등에서 활약했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이수병씨 같은 분은 4·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논문 「만적론」의 필자이기도 하다. 그는 5·16 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권이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관시키기 위한 고리로 끼워넣은 여정남씨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사태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8인 희생자의 한사람이며 이수병씨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용원씨와 같은 분은 아마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건실한 자연과학도로서 고등학교 동창인 이수병씨가 징역을 사는 동안 그를 꾸준히 돌봐준 사람이다. 두 분은 네것 내것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사이였고, 따라서 일어학원의 강사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이수병씨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중정의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직자금으로 둔갑을 한 것이다. 조용하고 성실한 고등학교 선생님, 따라서 죽인다고 해도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유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조작된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크게는 냉전논리에 따라, 그 냉전체제의 연장선 위에서, 적게는 특정 정권의 유지와, 안보, 혹은 정치적 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제물로 희생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 두 사람인가.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의 죽산 조봉암이 그랬고, 공화당 정권 하에서, 그리고 유신체제와 제5공화국 정권처럼 국민적 지지기반이 없었던 정권일수록 그 아래에서 숱한 희생자가 속출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들을 열사 혹은 의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천주교 정의평화 위원회가 87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렇게 숨진 사람이 제5공화국을 통틀어 80여명에 이른다던가. 냉전이데올로기로 부터의 탈출과 함께, 메카시즘적 수법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운동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상규명, 복권 이뤄져야…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으로부터도 철저히 잊혀지고 소외된 사건의 비극적 주인공들이 바로 인혁당과 그 사형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특정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조작된 사건이라할지라도, 그 관련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의 사건으로 조작되자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꼬투리라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당해 사건과는 실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독재정권의 독사 같은 이빨에 물려 소리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인혁당 사건의 8명 사형수들이다. 박정희정권이 유신정변을 일으킨 후, 유신체제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폭발하자, 긴급조치만으로는 모자란다는 판단 하에, 인혁당이라는 사건을 조작, 유신반대투쟁의 예봉을 꺾으려는 정치적 음모에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이 통렬했던 것도 아니요, 그들의 법정진술이 통렬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은 독재권력이 얼마나 잔인무도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극렬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재판이라는 요식과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독재정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준엄한 자기비판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 책임의 일단을 통감하면서, 필자는 적어도 오늘에 이르러 그들 모두의 복권이 이루어져야함은 물론,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밝혀져야 한다는 믿음 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는 4월 9일은 그들이 그렇게 죽어간지 14주



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날에 있었던 단순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이들을 기억하고, 또 무대에 올려 상연하는 것만으로 그 시대를 구차하게 살아남은 우리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정치권력의 강요에 따라 묻혀지고, 역사 속에서도 철저하게 가려진 이 사건을 밝은 빛 속으로 드러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82년 석방된 후 5년여를 살다가 간 유진곤 선생 역시, 그 분의 단명이 고문에 의한 것이고,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확언할 수 있다.
2002-05-10 12: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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