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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유신시절 강제 추방됐다가 14년만에 방한한 인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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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2:35:24  |   icon 조회: 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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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절 강제 추방됐다가 14년만에 방한한 인권 신부

화제인물인터뷰

유신시절 강제 추방됐다가 14년만에 방한한 인권 신부

제임스 시노트


70년대 유신 체제하에서 인권운동과 도시 빈민구제활동에 앞장서다 '75년 강제 출국당했던 미 제임스 시토느(60세) 신부가 지난 5일, 한국 땅을 밟았다. 시노트 신부는 추방당하기 전 15년을 인천의 답동 성당과 영종도 교구에서 평범한 사제로 헌신했던 사랑의 신부.

그가 인혁당 사건에 동참하면서 인권 신부로 변신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4년을 그가 한결같이 외쳤던 목소리,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75년 4월 9일의 현장속으로 달려가 본다. (글/김해경)




14년만의 방한이 꿈만 같습니다.


빛바랜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노라면 '75년 4월 서울의 현장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키가 장신인 한 사제가 사지를 땅에 끌리운 채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이 사진은 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인권활동을 벌이던 한 외국 신부의 투쟁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 야고버·60세)신부. '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체제하에서 인권 운동과 도시빈민 구제활동에 앞장서다 한국 정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던 그가 지난 5일, 14년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하루도 잊지 않고 항상 한국 얘기를 했던 탓인지 전혀 한국을 떠나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제2의 고향인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된 것이 꿈만 같습니다."

4월 9일 대구 경북대에서 있을 인혁당 사건 14주기 기념식에 참석코자 방한한 시노트 신부는 공항에 환영나온 인혁당 관련 미망인들과 재야 인사,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메리놀 수도원 사제들과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신부는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미국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종종 찾았다는 오리지날 김치와 불고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즐겨 부르던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열창했다. 6일에는 재야 인사들이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 마련한 환영 대회에 참석해 옛친구들이기도 한 1백50여 명의 민주 인사들을 만나는 기쁨도 나누었다.

봄빛이 따뜻하게 내리쬐이던 8일 아침, 성동구 중곡동에 위치한 메리놀 수도원의 외국 사제관을 찾았을 때, 진신부는 피로한 기색없는 밝고 환한 미소로 기자들을 맞았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공항에서 인혁당 사건의 미망인들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주일 날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릴까 하는 생각들을요."

그러면서도 앞서는 걱정도 있었다고 진신부는 덧붙인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많은 사람들을 잊지는 않았을까, 아직도 생생하기만한 기억들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순가 갑자기 쇠퇴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헌신과 사랑의 사제에서 인권 신부로 변신한 74년 4월


진신부가 소위 인혁당 사건에 동참하게 된 것은 '74년의 일이다. 군 제대후 어렸을 적부터 소망하던 신부가 되기 위해 뉴욕의 메리놀회신학교에 입학, 선교사 훈련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은 건 스무살 되던 해.

진신부는 '60년 5·16이 일어나기 얼마전 한국에 파송된 후 인천의 답동 성당을 거쳐 영종도의 교구에서만 10년 넘게 일했다.

전기불,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낙후된 섬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했고 병든 이들도 많았다. 진신부는 그저 사제로서 그들에게 교리를 전하고, 병든 사람과 고통을 함께 하며, 구하기 힘든 약을 백방으로 구해 치료의 손길을 펼치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 말씀 전하고 그들에게 베풀며 살겠다는 생각만을 했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도시에 나가 돈을 번다고 하면서도 치료비조차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했고, 병이 완치되면 섬을 떠나 다시 도시의 공장으로 가 버리더군요. 그리고 이내 병들어 돌아오고… 결국 나의 헌신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본질적인 문제를 단순히 선을 베푼다는 차원이 아닌, 그들 편에 서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그들은 가난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왜 배고픈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으로 그들의 문제를 대하자 그는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알게 됐다. 그후 그는 영혼의 문제 위에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음 안되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앞장서게 된다. 진신부가 한국의 인권 문제, 도시빈민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74년 4월 25일 한국 중앙 정보부의 인혁당 사건 전모에 관한 발표가 있기 며칠전, 그는 당시 미중앙 정보국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래그(주한 미 대사 내장자)의 한 부하직원으로부터 '한국정부가 시위 학생 등 반정부 세력을 곧 정비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또한 당시 미 대사관에 근무중이던 한 친구가 인혁당 관련자들이 고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데 대한 양심의 고민을 진신부에게 털어놓자 그도 자신의 입장은 무엇인가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고, 고문 조작설이 터져 나오고, 신문에 인혁당 사건이 듣던대로 드러나고, 관련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작극이란 심증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크나큰 충격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가족들을 돕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음 다졌다.




인혁당 조작 항의 시위로 강제 출국 당해


'74년의 2차 인혁당 사건은 당시 신직수 정보부장에 의해 발표되었다. 유신 헌법의 철폐를 주장하는 청년 학생들의 조직인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공산 계열의 불순 조직이라는 것이 당국의 주장이었다.

70년대 최대 시국사건인 민청학련 관련자로 당시 1천24명의 학생, 교수, 일반인들이 혐의를 받고 50여명이 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중에서 23명이 인혁당이란 이름으로 분리돼 사형 또는 징역 15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 받게 된 것이다.

그 후로 진신부는 시국 관련자들을 위한 목요 기도회에 참석함은 물론 항의 시위에 앞장서면서 국제사면위, 미하원 인권위에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특히 당국은 대법원 판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방한한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에게도 '염려 말라'는 언질을 주었고, 그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던 사람들도 이를 믿었지만 결국 피고인중 8명은 사형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75년 4월 9일, 서도원·하재완·도예종·이수병·우홍선·송상진·김용원·여정남 등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형됐다. 그들은 재심의 기회도 박탈당한 채, 가족과의 마지막 면회도 일체 허용되지 않은 가운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월 9일 아침, 관련 가족들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기다린다구요. 상상도 못한 결과였어요."

8명의 사형수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넘겨지는 과정에서도 사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시체는 다음날까지 가족들에게 인도되었지만 주변에 많은 경찰을 배치한 상황에서 당국에 의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연고지로 옮겨졌다.

영구차의 앞뒤는 경찰차로 에워싸여졌다. 송상진의 경우 함세웅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응암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 했지만 성당에 얼마 못미쳐 경찰이 동원한 크레인에 의해 벽제 화장터로 가야 했다. 자연히 시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가족, 종교계 인사들과 경찰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진신부는 경찰차가 앞뒤로 둘러싼 가운데 이수병 씨의 시신과 함께 그의 녹번동 집으로 갔다. 그의 부인 이정숙(44세)씨는 진신부가 시신을 확인해 주길 원했지만 그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57세)씨는 진신부에게 남편의 고문을 확인시켜 줄 외국인 의사를 부탁했고, 진신부 또한 이들과 함께 고문의 흔적이 뚜렷한 시신을 함께 목격했다.

"안장 때 묘지까지 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15세된 그의 어린 딸이 나에게 다가와 울먹이며 말하더군요. 신부님 감사합니다라구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진신부는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주장하며 대법원 앞에서부터 미대사관까지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 항의 시위와 관련, 비자를 갱신해 주지 않아 4월 30일 강제 출국을 당하고 말았다.




진실을 밝히는데는 말보다 행동의 실천이 필요


"지금도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미망인들이 '진실을 밝혀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진신부는 귀국후 미 정부에도 항의했지만 10여차례의 연행만 당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BBC에서 제작한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 미국 전역과 일본, 독일, 스위스 등지를 돌며 항의를 계속해 왔다.

지난 14년간 그는 한국 관계 집필을 위해 꾸준히 한국 역사 서적을 탐독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쉬지 않고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지난 14년간 그의 주활동 무대는 중미와 남미 지역. 니카라구아, 엘살바도르 등지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제로서의 헌신과 사랑은 물론 인권운동을 펼쳤다.

'85년부터 '87년까지는 칠레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지냈다. 사랑은 경제적인 부유나 식량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질문을 던져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오늘'은 해결되어도 '내일'은 배고플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진실의 횃불을 밝히는데 있어 두렴움없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진신부는 지난 9일, 방한 목적이기도 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 14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미망인, 가족들을 위로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했다.

"… 우리는 진리, 사실을 세상에 알리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시도 잊지 못했던 인혁당 사건의 가족들을 14년만에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진신부의 눈엔 우리의 민주화의 열기와 많은 정치적 변화가 놀랍게 비친다. 그러나 다양하고 복잡해진 것 같지만 말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상황들 때문인지 그가 방한한다고 했을 때 아흔 셋인 노모 마가렛 여사는 아들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60년 처음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우리 엄마, 나보고 안돼! 라고 말씀하셨었지요. 고향에서도 선교할 수 있다고 말리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면 가야한다는 제 생각을 막진 못하였어요. 주님 나라에선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같은 나라니까요. 이번에도 그러시더군요. '오래 있지 마. 너 죽으면 어떻게 해'라구요."

그러나 진신부는 어머니의 지나친 염려가 진실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리워졌던 진실이 바로 잡히길 그는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4월만 되면 가슴아파 환갑잔치 치르고 떠나겠다.


"재심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 남편이 억울하게 사형 당하자, 독재자 박정희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박정희의 사진을 그가 10·26으로 죽을 때까지 약 5년 동안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내뱉곤 했어요.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 푸른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는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어요. 한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반드시 세 번씩 외쳤어요. 끝내 하늘은 무심치 않았습니다. 이웃나라들로부터 야만인이란 평까지 들어가며 죄 없는 양민 8명을 학살한 원흉 박정희는 끝내 자신의 심복이던 김재규의 손에 죽지 않았습니까?"

우홍선 피고인의 부인 강순희 씨의 한맺힌 목소리가 모든 유가족들의 응어리진 마음일거라고 생각하는 진신부는 거짓으로 가려진 진실은 진실의 목소리를 높일 때 반복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매년 4월 9일만 되면 마음이 아팠어요. 마치 내 아버지 기념날 같아요."

메리놀 수도원의 숲길을 바라보는 진신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백발의 노사제의 눈과 마음은 아직도 '75년 4월의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진신부는 관광비자가 끝나는 대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입장이지만 간첩의 아내로, 자식으로 지난 15년을 한과 눈물로 지내야 했던 유가족들에게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길 그는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6월 18일, 환갑을 맞이하게 될 진신부는 영종도에서 환갑잔치를 치르고 돌아가고픈 생각도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진 않았다며 미소짓는다. 수도원의 정원을 거닐며 어느덧 옛 생각에 잠겨있던 진신부는 귀에 익은 한 노래를 나즈막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승리 하리. 우리 승리 하리. 우리 승리 하리라 그 날에. … 우리 승리 하리라."
2002-05-10 12: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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