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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이영교 어머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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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2-05-10 12:37:18  |   icon 조회: 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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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교 어머님의 글입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혁당 진상규명 발대식)
1998. 11. 9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의 억울한 사건을 잊지 않고 '인혁당'진상규명에 동참하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종 세칭 '인혁당'이란 허울을 씌워, 박정희 독재정권이 자신의 장기집권의 제물로 삼아 자행한 민주인사들의 학살음모에 억울하게 처형당한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가족을 대신해 남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감내하고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24년이란 모진 세월이 흘러간 사건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사건이라고들 합니다.
1974년 사건의 초기에는 3, 4월의 위기설로 나도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학생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민청학련이란 미명아래 대거 검거한 후, 세칭 '인혁당'이란 가상의 공산주의 정당의 배후조종으로 움직였다는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입니다.
재정권이 장기집권하기 위하여 만든 유신헌법이 반민주적이며 반민족적이라 유신헌법의 위헌성에 생각을 같이한 동료들과 이야기 죄, 또한 한일수교는 굴욕외교라 반대, 7·4공동성명 환영, 삼선개헌 반대 등과 자주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 등의 죄로, 각각 인혁당의 당수로, 조직책, 자금책 등의 직책을 정보부로부터 배당받아 재판에 회부된 피로 얼룩진 사건입니다.
1. 지하실에 갇힌 채 3일씩 잠도 재우지 않고 '꿇어 앉아'라 '서라'를 수없이 되풀이하였으며
1. 심한 고문에 항문도 빠지고 탈장도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 지나친 고문으로 귀도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1. 어떤 분은 무엇을 돌렸는지 한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터져 죽을뻔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 심지어 어떤 분은 취조관이 술에 만취되어 전기고문을 할 때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나, 간첩이라는 누명이 싫어 간신히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1.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 20명만 이름을 대라면서 고문을 당한 적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1. 재판과정에서도 고문에 지쳐 횡설수설한 것을 진술로 적어 무슨 내용인지 읽어 보이지도 않고 손을 비틀어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고 진술하니, 검사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면서 "너희들 아직 덜 맞아서 그 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 나중에 더 때려주지. 각오해"하면서 피고들의 눈이라도 찌를 듯 손가락을 휘두르며 두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는 모습은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피고들 중 아무도 고문에 대한 말이 없었습니다.
총을 든 헌병 수십 명이 법정 안을 에워싸고 있었고 가족들 한 사람만의 방청이 허용되었으며 몸과 소지품을 수색 당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군사재판은 최소한의 상식을 벗어난 무법과 불법, 폭력 그 자체였습니다.
두 팔을 뒤로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삼엄한 경계 속에 벌어진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피고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재판에 임하여 재판장을 현혹케 하였습니다.
본적과 이름과 묻는 말에만 '예''아니오'외에는 일체의 발언도 묵살당한 채, 구형, 선고, 기각만을 외쳐대는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하는 박정희 정권의 허수아비들의 목청소리만이 높은 재판이었습니다.
최후 진술에서 저의 남편 하재완은 "여정남은 아들의 가정교사였을 뿐이다. 어떻게 아들의 가정교사를 고지할 수 있겠나. 정관 정책도 없는 당이 있을 수가 있으며, 맨주먹으로 어떻게 정부를 타도 전복할 수 있는가! 현 정부가 그렇게 빈약한가! 특히 우스운 것은 서울 중심가의 다방에서나 무교동의 번화한 술집에서 정부전복의 모의를 했다고 하니 삼척동자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라고, 정보부의 과잉충성으로 인혁당으로 몰리게 됨을 나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족면회 한번 없었으며 증인채택도 거부당하고, 변호사의 면담횟수와 면담시간도 제한된 사건이며, 출입기자도 없는 군사비밀 재판이었습니다.
75년 4월8일 대법원판결에서는 가족방청 한사람으로 제한한 채 피고들도 없는 법정에서 재판관들만이 출석하여, 피고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상고, 기각원심확정, 구형만을 낭독하고는 재판시작 10분도 안되어 재판은 끝이 났으며, 재판관들은 앞다투어 재판정을 빠져나갔습니다.
재심의 기회도 주지 않고, 사형판결 17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 새벽 여덟 사람의 목숨은 한꺼번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어이없게 목숨을 앗아간 여덟 명의 유언조차 조작한 자들이며, 그분들의 묘비마저도 뽑아간 자들입니다.
또 수사관들의 수사방법은 너무도 비열하였으며, 신문보도는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한 동네에 살던 이웃들이 모여 "동네 한 가운데 간첩을 두고 살았다."고 수군대면서 저희 집 근처에는 아이들이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따가운 눈총과 수군거림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장성한 막내아들이 당시 겨우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있던 4살.
그런 아이를 동네아이들은 '너희 아빠는 간첩이다'며 새끼줄에 목을 매어 끌고다니면서 때리고 나중에는 동네 나무에 묶어놓고 총살시키는 장면을 동네 어른들은 만류는커녕 웃으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며칠후 둘째 딸의 초등학교 소풍날이었습니다. 당시의 경황에 아이들의 소풍에 따라갈 수 없는 처지라 혼자간 딸아이는, 점심시간에 반 아이들이 몰려와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간첩의 딸이라며 돌을 던지는 것을 학부형 중 한 사람이 만류하여 나무 뒤에 숨어 울면서 도시락을 먹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차라리 내가 죽어 아이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다면 제가 죽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장기집권 야욕 때문에 아이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그늘과 상처를 남기는 그 현실 앞에서 저는 수없이 무너졌고 또 일어섰습니다.
24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지난날의 그 뼈아픈 사연들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사건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바른 평가를 받고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땅의 안녕을 걱정하며 돌아가신 그 분들 역시 이나라 이 땅의 주인이었습니다.
이 날을 이 자리를 언제나 기다렸습니다.
저희들 인혁당의 아내들은 이제 60을 넘어 70에 가까운 늙은 몸이지만 인혁당 진상규명에 마지막 힘을 모을까 합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 그 분들의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싶은, 얼마 남지 않은 저희들 인생의 마지막 소명이며 저희들에겐 이 일만이 남았습니다.
저희마저 한줌의 흙이 되기 전에, 마지막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힘이 되어 주시기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1998년 11월 9일
이영교
2002-05-10 12: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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