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인권] ‘국가보안법’과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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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과 인권] ‘국가보안법’과 ‘광우병’
  •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
  • 승인 2008.06.1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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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된 송두율 교수는 2004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해 8월 2일 45년 만에 광주를 찾은 송 교수는 망월동 묘지 방명록에 “긴 외국생활에 용기를 줬던 광주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고 적었다. (출처-민중의소리)

서울과 베를린 사이의 시차관계로 지난 4월 17일 새벽에 나는 대법원판결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속보가 계속 나올 정도로 큰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이번 판결은 원래 3월 20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법원 측의 어처구니없는 행정착오로 인해 나의 변호사 측에 사전 통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4주 뒤로 미루어졌다.
"송두율 교수 상고심 파기환송"이라는 제목이 인터넷에 떴지만 처음에는 나도 헛갈렸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 나올 때 날을 세운 일부 보수언론들이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라면서 재판부를 맹공했기 때문에 대법원이 이번에는 이들의 의견에 쫓아 나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 고법으로 환송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 신문들은 그렇게 충분히 해석될 수 있게끔 제목을 뽑기도 했다. 게다가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드디어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한 세력이 지금은 힘을 쓰는 시절이 아닌가.
담당변호사들이 직접 전화해서 이번 판결의 내용과 의의를 설명해주어서야 나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 대법원 판결문과 대법원 공보관의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오해의 소지가 전혀 있을 수 없는 명확한 내용을 어떻게 그러한 신문들이 그런 식으로 보도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나를 "해방 이후 최대간첩"으로 몰아 여론재판을 이미 끝냈던 보수 언론매체들이 이번 판결내용을 그대로 보도하기에는 아주 낭패했거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사건이라고 판단되면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열심히 논평을 내면서 여론을 오도하는 그러한 언론들이 이번 사회적으로 의미와 파장이 큰 대법원 판결을 애써 빗겨 가려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扁)>에는 사각형의 한 모서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나머지 세모서리의 문제도 자연히 풀 수 있다는 뜻에서 계발(啓發)이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재판의 결과가 남남갈등, 남북갈등 나아가 동북아 갈등이라는 다른 세 모서리의 문제를 깨우치는 <계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저는 바랍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정말로 유치한 상호비방 방송이 휴전선에서 멈춘 것처럼 저는 <국가보안법>도 이번 재판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 2004년 6월 30일 송두율 교수의 항소심 최후진술

나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하고 비아냥거렸던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자성, 아니면 적어도 자기변명의 소리라도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당시 앞장서서 그런 신문에 글을 써서 나를 매도했던 어떤 교수는 여전히 고상한 "학문의 조건"을 이야기 하고, 또 "지성의 향연"을 예찬하고 있지만 ‘마녀사냥’을 이끈 반지성적인 언동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는 자성의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의 대법원 판결의 의의를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의 ‘탈출’ 개념에 관한 새로운 판시라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외국국적자가 북한을 방문해도 ‘탈출죄’를 적용 처벌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상식에 반한 법인지를 또다시 보여주었다.
또 내가 한국여권으로 북을 방문했다는 것을 유죄로 해석한 부분에 대해서도 세 명의 대법관은 무죄라고 주장한 별개의견을 제시했고, 또 다른 대법관 한 명은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나 개정을 요구하는 의견을 내었기에 이번 판결은 분명히 전향적이었다는 일반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2003년 9월부터 시작된 내 사건이 만 4년 7개월 만에 이렇게 마무리 되자 당시 주한 독일 가이어 대사는 "한국의 시계바늘이 너무 늦게 돌아간다"는 소회를 피력하며 축하메일을 보내왔다.
지난 5월 8일, 쥬네브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또 다시 국가보안법의 개정이나 철폐가 강력히 권고되었고 미국마저 이에 동조했다.
그런데 국내의 분위기는 어떤가? 2004년 그 추운 겨울,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했던 시민들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열린우리당이 하지 못했던 일을 18대 국회가 성사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만 손을 놓을 것 인가. 이번 대법원이 보여준 것처럼 전향적인 판시를 통해서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낙관도 가능하다. 그러나 박시환 대법관의 별개의견이 지적한 것처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수호하는 헌법정신을 공권력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침해할 소지가 항시적으로 있기에 폐지는 절실하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고 ‘선진국가’나 ‘일류국가’를 만든다는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세계는 잘 안다.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여론이 들끓는다고 들린다. 국가보안법도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건강을 해쳐왔다. 나에 대한 중형이 선고되자 ‘한국은 이제 국가보안법을 독일로 수출하려는가’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탈출’에 대한 대법원의 새로운 판결은 이러한 비난을 우선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건강한 정신을 가꾸기 위해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키울 수 있다. 4년 전 나와 나의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던 그 많은 분들에게 다시 깊은 감사를 드리며, 촛불을 켜고 이제 다시 거리에 나선 그 분들의 건강과 건투를 이역만리의 땅에서 빈다.

2008년 5월 13일, 베를린에서 송두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