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책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읽고
상태바
서평 책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읽고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20.08.03 22: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각인”의 무게

각인의 무게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읽고

배여진(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

필자가 한국 현대사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국사 시간이었다. 지루했던 국사시간에 졸린 내 눈을 딱 한 번 반짝이게 해준 부분이 현대사 부분이었는데, 아주 짧고 강렬했다. 대학생이 된 뒤, 오다가다 추천 받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라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숱한 현대사 현장의 주인공이 되어 격동의 시간을 홀로 보내고 있었다. 학창시절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시절, 여러 현대사의 현장을 방문할 기회들이 있었지만 당시 성당 주일학교 교사 활동을 하느라 주말에는 참여가 힘들어 그 기회들을 놓쳤다. 언젠가 꼭 가봐야지, 하는 나의 게으름은 아이 둘 육아 핑계로 아직도 미루고 있다.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쓴 책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는 제주 4.3 현장, 전쟁기념관, 소록도, 광주 5.18 현장, 남산 안기부터와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마석 모란공원, 세월호 참사 현장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굵직한 현대사의 장소를 방문하고, 돌아본다. 장소와 공간을 직접 가보는 경험은 글과 머리로만 이해했던 상황들이 내 눈앞에 마치 가상현실 장면처럼 실제로 펼쳐지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 온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분명 어떠한 잔상으로서 내 몸에 각인된다.

 

10여 년 전,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일주를 하며 너븐숭이 4.3기념관을 들렀었다. 그곳에는 아이가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큰 아이를 출산하고, 모유수유를 하던 어느 날인가 불현 듯 이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의 상황이 상상만으로도 괴롭고 힘이 들어 일부러 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 그림을 볼 때에는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 내 아기에게 젖을 주는 상황에서 그림이 생각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억이란 것이 이런 것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2년이 넘도록 세월호 관련된 기사를 잘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녹슨 배를 보러 목포에 갔다. 함께 갔던 아이 둘은 커다란 배가 왜 녹이 슨 채 쓰러질 듯 세워져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난 저 안에서 재잘거리며 웃는 학생들과 사람들이 가득한 장면이 자꾸 상상돼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꼭 이곳에 와야 했을까. 아니, 오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박래군의 책 속에 있었다. “‘전쟁의 기억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은 망각의 대상이다”.(p75) 비단 전쟁기념관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배제하려하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또 ‘의도적으로’ 무언가, 누군가 배제되려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숱한 현대사의 아픔을 디딤돌 삼아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기억”을 통한 각인은 어쩌면 우리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목적지는 결국 사람”이라고 밝힌 박래군의 말처럼 기억과 각인의 무게는 결국 ‘사람’의 무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