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과 인민혁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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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과 인민혁명당"
  • 안주리
  • 승인 2003.04.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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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의문사 진상규명위의 발표 후 <오마이 뉴스>에 보도된 당시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씨와 대법관 한환진씨의 주장에 대한 임구호 선생의 반박글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유신독재자 박정희정권에 의해 자행된 "인민혁명당 재건단체"사건은 아직도 가해자의 날조와 피해자의 분노가 대립하는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고문 수사의 책임 하수인 중의 한사람인 이용택(중앙정보부6국장)은 "북"과 연결된 실재한 반국가단체로 왜곡된 망발을 계속하고 있고, 한환진(대법원판사,대법원장;민복기)등은 "소신 껏 판결했다"고 답변하고 있다.

영구집권의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민주세력의 저항과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공화국(김지하;오적)과 빈부격차의 확대,
부실경제의 구조적 위기와 오일쇼크에 의한 경제난국,
월남 패망에 따른 반공이데올로기의 파탄등
박정희 팟쇼정권의 말기적 위기상황 돌파용으로서 사법학살재판극이 자행될 당시 말미에서 어거지 부역을 강요당했던 피고인으로서 이 사건을 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몇 자 글을 올린다.

「박정희」유신독재 정권 하에서 발생한 1·2차「인민 혁명당」사건은
1)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상황에서 발생하였다.
1차 인혁당사건은 "친일 매국노"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회담"
을 강행하려하자, 국민적 저항에 봉착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애국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2차 인혁당 사건은 73년 "김대중납치사건"과 74년 "유신헌법 개정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4호"를 선포하는 등
공포분위기 속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2) 「북」과의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은 "자생적 혁명조직"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의 반국가단체 즉 소위 2차 인혁당사건으로
객관적인 증거 없이 일방적으로 판결되어졌다.
수사·정보기관은 "의심은 가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수년동안 감시를 해왔고,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간 바늘하나 숨길
수 없었던 고문·조사에도 증거나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면
「북」과 관련설은 추악한 권력의 거짓 사상공작에 불과하다.

3) 정보·수사 당국의 총체적 탄압과 봉쇄에도 불구하고,
수사·재판 과정의 적법성과 고문에 의한 조작성 문제로 공안당국
은 국내·외 양심세력으로 부터 끊임없이 비난받아 왔다.

4) 국내·외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유명인사는 아니지만 「4.19」
후 크게 성장한 주로 영남지역의 혁신계 및 민주인사들을 대상
으로 하여 사건이 조작되어지는,
정치·사회적 특징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1·2차 인민 혁명당 사건」은 단순히 정보·수사기관에서
포착한 "반국가 조직사건"으로 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
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선 11월 18일자 "오마이 뉴스"에서 보도된 당시 중앙
정보부 6국장 "이용택"의 변명과 21일자 대법관 "한환진"의 기억에
대해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1. 이용택씨는 인혁당은 "실재했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체포 후 처형 때까지 가족접견을 금지하고,
가족 1인만 방청을 허용하는 살벌한 재판을 강행 하였으며,
2심은 변호인의 변론이나 최후진술의 기회까지 박탈하고,
대법판결 20 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하였는가 ?
또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기도 전에 대통령·국무총리·법무장관이
직접 나서서 사실홍보를 지시하고,「김지하」시인을 구속하였던가 !
다른 공안사건 경우에도 일찍이 이런 예가 있었던가 ?

2. "3권분립"이 이루어진 대법원에서 한 판결이라고 했는데,
원심법원(1·2심)은 유신헌법에 근ㄴ거하여 대통령이 선포한"긴급조치 2호 10항"에 의해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활사건의 정보·수사 및 보안업무를 조정·감독"한 사실상 중앙정보부 직할법정 이었다.
더구나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까지 조작한 판결을 근거로 대법원
이 올바른 심판을 할 수 있었겠는가 ?
특히 민복기 대법원장은 박정희와 같은 친일배 출신으로서 "5.16"
후 출세의 가도를 달린 사람인데 대통령의 의중을 무시하고
공정한 판결을 주도할 수 있었겠는가 !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각 부처에 사실홍보를 닥달하는 상황에서 !

3. 부하들이 상관들 몰래 고문을 했다고 가정해 본 경우에도,
가족들과 종교인들의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운구차를 크레인으로 견인하고, 「문정현」신부님의 엉치뼈를
부러떠려 평생 불구로 만들면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까지 한
처사는 분명히 해명하여야 할 것이다.
이 만행은 부하들의 손에서는 감행될 수 없는 차원 아닌가 ?

4. "노트"에 대해서도 이용택씨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피의자 심문조서·공소사실·공판조서 어디에도 외부에서 유입된
흔적이나 이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는 단서는 없다.
오히려 하재완씨가 수주간에 걸쳐 라디오를 청취하며 작성했고,
송상진씨가 몇일간 대신 청취해준 자료까지 증거물로 압수되어
있다. 재판에서 확정된 사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심정을 사실처럼
강변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 나이 탓에 오는 착각인가 ?
또 이 "노트"는 반국가단체 구성(국가보안법)과는 아무관계가 없고
반공법위반죄(7년 이하의 징역형)에 불과한데도 주요 증거물인
것처럼 견강부회하는 행태는 참으로 안타깝다.

5. 김배영이란 사람이 이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
1심 법정에서 김종길 변호사는 변론을 통해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수배된 2인 중 한사람은 동해안에서 "미 OSS 첩보선"을 타고
월북했으며, 김배영씨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친척집에 피신해
있다가 한국경찰의 추적을 피해 월북하고, 67년 남파되었다가
체포·처형되었으며, 1차 인혁당사건 당시에는「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법정 증언을 하셨는데,
도대체 2차 인혁당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6. 한환진 당시 대법판사는 "……심리는 순탄하게 진행…, 소신껏 판결
에 임했다.…판결문은 이번에 처음 봤다,……"고 말했다.
참으로 황당함을 느끼게 하는 진술이다.
매주 "목요기도회"가 열리고, 유신헌법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한국 역사상 처음 있었던 "선교사들의 추방"이 강행되는
등 극도의 혼란상황에서 "심리를 순탄하게 진행"하고,
이일규대법관이 "하급심에 문제가 있다"는 소수의견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판결에 임하"는 심리상태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더구나 8명의 생명을 앗아간 "자기들의 판결문"을 2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처음 보았다는 솔직함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27세∼35세; 7년 10개월 ― 황금의 청년기를 감옥생활로 버텼지만,
나는 아직도 「인민 혁명당」의 실체와 "노트"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구집권을 획책한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위기 돌파용
으로서 어거지 부역을 당했다는 자괴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친일 매국노, 민주 반역자" 박정희의 망령이 지배하는 "영남지옥"에
서 유신잔당들의 채찍에 살이 터져도, 가해자들의 참회와 화해를 위한
"용기와 정직"을 기대해 왔던 나 자신이 참으로 초라했지만, 그들의
죄업이 더 깊어지는 현실을 확인하는 심정은 괴롭다.

물신(황금·쾌락·편의)숭배에 혼을 빼앗긴 대중들의 무심한 눈길에
더 큰 아픔을 느끼면서도 오는 세상의 희망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2003. 4. 8.


인혁당재건단체 사건으로 징역15년을 선고 받았던 임구호씨가 지난8일 대경연합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