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은 정권의 조작"18시간내 사형집행 박정희 개입 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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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은 정권의 조작"18시간내 사형집행 박정희 개입 암시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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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진실위 7일 조사결과 발표... '북파 공작원'까지 남파간첩으로 둔갑
▲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가 7일 오후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신 대체 : 7일 오후 5시 10분]

41년만에 드러난 '인혁당 사건'의 진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공안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의 진실이 41년만에 드러났다. 1964년 인혁당 사건과 1974년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 독재정권의 위기를 느끼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와 법무부 등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군사법원과 대법원 등 사법부까지 총동원해 조작해 낸 사건으로 밝혀졌다.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진실위·위원장 오충일 목사)는 7일 오후 1시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혁당 사건 등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국정원 진실위 조사 결과,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을 북한과 연결짓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고문을 자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64년 인혁당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는 남한 정부가 '북파'한 공작원을 남파 간첩으로까지 둔갑시켜 관련자들을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또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수사에서 사형집행까지 사전에 치밀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신속하게 집행한 흔적이 드러났다.

대법원 상고기각 판결 이후 불과 18시간만에 사형수 8명 전원의 형을 집행한 것이 이와 관련한 결정적 증거로 인정됐다. 이는 또 박 전 대통령이 사건 조작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는 점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 = 인혁당 사건은 1964년 당시 6·3 사태로 불리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계엄령까지 선포한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이다. 당시 중정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했다"(1964년 8월 14일)며 관련자 57명 중 41명 구속, 16명은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중정은 또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배후조종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정이 수사해 발표한 인혁당 사건은 당시 사법당국으로부터도 반발을 받는 등 조작 논란이 끊임없었다. 인혁당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 등은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신직수 검찰총장 등 수뇌부는 고문 조작 의혹에도 12명을 기소했고, 이들은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국정원 진실위는 7일 발표에서 "인혁당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서클 형태 모임"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 중정 발표에서 인혁당 창당 이후 월북한 '남파 간첩'으로 지적된 인물 '김영춘'은 사실 동아대 교수를 지낸 김상한(1919년 출생)이며 "남한의 다른 대북 정보기관으로부터 특수공작 임무를 받고 북파된 사람"이라고 밝혔다. 결국 남한 정부가 북으로 보낸 공작원까지 간첩으로 꾸며 인혁당 관련자들을 북한과 연계시켰다는 얘기다.

아울러 국정원 진실위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또 검찰의 인혁당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 민청학련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 선포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1974년 중앙정보부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들이 북한과 조총련 사주를 받아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며 발표한 공안 사건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74년 4월 3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반정권 유인물이 뿌려지자 "반국가적 불순세력을 발본색원한다"며 긴급조치 4호(특별담화문)를 발동했다. 같은 해 7월 이철(전 국회의원)·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황인성(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 관련자 32명이 기소돼 사형(7명), 무기징역(7명), 징역 20년(12명), 징역 15년(6명)이 각각 선고됐다.

국정원 진실위는 민청학련에 대해서도 인혁당과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았던 조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 진실위는 "민청학련은 중정 발표처럼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가 아니라 반유신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연락망 수준의 조직이 유인물에 표기한 조직명칭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국정원 진실위는 또 당시 '수사상황보고서'(74년 4월 21일자)를 근거로 "수사 이전에 미리 발표된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과 수사 결과가 일치되도록 만드는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가 진행됐다"고 발표했다. 수사상황보고서에는 "학생들이 간첩과 재일조총련 등의 사주를 받아 폭력으로 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점을 입증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어 국정원 진실위는 "민청학련이 인혁당 재건위나 조총련 사주를 받은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 배후조종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미 10년 전인 1964년 인혁당 사건을 일으킨 바 있는 박정희 정권은 1974년 5월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발표를 통해 "서도원, 도예종 등이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그해 7월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 8명은 전원 사형이 선고됐고, 다음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형을 확정했다. 그 후 불과 18시간만인 4월 9일 새벽 4시 8명이 전원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도 '사법 살인'이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국정원 진실위는 이날 발표에서 "인혁당 재건위원회라는 단체의 실재를 입증할 물증이나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는 자백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혁당이나 민청학련 사건처럼 '실체 없는 조직'을 군사법원 검찰부가 만들어낸 셈이다.

국정원 진실위는 또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과 연계됐다는 중정 주장은 하재완(당시 연루자) 노트에 불과하고 평양 방송의 내용을 지령으로 인식했다는 주장 역시 과도한 해석"이라며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대북 연계설을 공식 부인했다. 고문과 조작에 대해서도 국정원 진실위는 "수사과정에서 고문, 강압적인 수사 등 관행적이고 폭넓은 인권침해 행위가 자행됐음을 부정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7일 세 가지 사건이 모두 고문에 의한 허위 조작임을 발표한 국정원 진실위는 정부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피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적절한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해 왔는데, 이제 이러한 과거와 결별하려는 국가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정원 진실위는 '김대중 납치사건', 'KAL858기 폭파사건' 등 나머지 조사 과제에 대해서도 12월말이나 내년 1월 중순께 조사를 마치고 발표할 예정이다.



"인혁당 사법살인 '박정희 지시' 확실"


7일 국정원 진실위가 발표한 '인혁당(재건위)·민청학련' 사건 조사 결과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나 개입 여부였다.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최고 윗선의 특별 지시가 없었다고 상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실상 세 가지 사건 모두 박 전 대통령의 의지와 지시가 반영돼 있다고 결론 내린 셈이다.

특히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이 다음날 새벽 곧바로 형집행 된 것을 박 전 대통령 개입설의 강력한 근거로 들었다.

국정원 진실위 안병욱(가톨릭대) 교수는 "(인혁당 재건위나 민청학련은) 긴급조치 4호라는 박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이뤄진 군사법정에서 모든 사건이 처리됐다"며 "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서를 내려보낸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사형 집행이)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라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오충일 위원장 역시 "8명이라는 많은 숫자의 사람을 18시간만에 사형 집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더라도 상식 밖의 일"이라며 "군 통수권자가 대통령인데 군사법정에서 대통령 책임 하에 이뤄지지 않고서는 사형집행은 불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직·간접 지시가 있었다는 얘기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사한 한홍구(성공회대) 교수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 굉장히 격앙했다는 것을 특별담화문(긴급조치 4호) 등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75년 박 전 대통령이 문화공부부 순시 자리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처벌이 늦어지는데 대해 '법무부와 정보부는 도대체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고 크게 질책한 것도 일종의 지시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인혁당 재건위 사형수 8명은 박 전 대통령의 발언 뒤 불과 2개월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 김영균 기자


[1신 : 6일 밤 10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지난 1974년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진실위·위원장 오충일 목사)는 7일 오후 1시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1·2차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 인혁당 사건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기획된 조작 사건으로 결론지을 것으로 알려졌다.

오충일 위원장은 "조사 결과 인혁당 사건은 정권의 안보와 독재정권 유지 차원에서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라는 선전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오 위원장은 "1974년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차 인혁당(1964년) 사건과 묶어서 정권이 만든 것"이라며 "이에 대한 현저한 증거도 가지고 있고, 내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 위원장은 "조사 결과 (인혁당 하부조직인)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며 "인혁당 사건은 군사독재가 공안정국을 삼엄하게 만들어 재야세력을 탄압한 대표적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에서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고 최종 승인한 배후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인지에 대해서는 결론 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입됐다는 결정적 자료나 증언은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오 위원장은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박 전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오 위원장은 "재판 후 불과 18시간만에 8명의 사형수가 사형 당했는데, 군법이 적용되던 당시 상황으로 봐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많은 숫자를 한꺼번에 사형시킬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진실위의 발표는 국정원이 스스로 인정한 '자기 고백'이라는 점에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 김영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