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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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공포
  • 엄윤상(인권위원, 변호사)
  • 승인 2009.09.2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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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의 정신적 피로도는 극한에 도달해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상황마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이 더 스트레스를 쌓이게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 원인은 다양합니다. 일중독, 늘어난 회사와 가정의 식구들에 대한 책임감, 매일 다양한 이유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 보수정권의 몰염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우리 대표선수들의 선전의 부재(?), 너무 세상을 알아버린 제 자신의 무력감 등등.

다른 무엇보다 저를 괴롭히는 스트레스는 제 주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젊음과 열정으로 군사정권 및 부조리에 맞서서 싸울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공포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잃을 것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싸우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상대도 뚜렷했고, 그 수도 많지 않아서 재미도 느꼈습니다. 나름대로 정해놓은 전리품도 얻었고, 그것이 당시에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싸울 상대가 모호하고, 그 수도 가늠할 수 없고, 더군다나 저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져서 잃을 것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젊음도 서서히 퇴색되어 가고, 열정도 많이 식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의 공포와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부당한 권력이나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고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 공포 없는 아름답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적으나마 후원을 하고 있고, 방송이나 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대중의 자각을 깨우려 하기도 하였답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이 모호하고 불안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사회적 가치보다는 물적 가치가 신(神)이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누구는 오늘도 부동산값의 변동과 주식가치의 등락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터넷을 여행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미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린 사람들은 폐지를 주우며 오늘 끼니를 라면으로 때워야 할지, 쌀을 살 수는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다 결국 로또 2천원어치를 삽니다. 로또가 유일한 희망이 된 지금, 끼니와 로또를 쉽게 바꿉니다. 있는 사람들은 세금과 세무조사, 부동산값 하락, 도둑에 대한 공포, 없는 사람들은 생존의 공포 속에서 물신(物神)은 조금씩 희망을 좀먹었고 남아있는 희망은 작은 조각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거꾸로’의 주역들은 승승장구하고 있고,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작은 목소리는 메아리 없이 뭉개지고 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일갈한 노정객의 마지막 외침조차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신선한 양심은 싹이 트기도 전에 입시전쟁, 취업전쟁에 내몰리다 스스로 시들고 있고, 노회한 양심은 술자리에서 흘러간 옛날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제가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모호하고 불안한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