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과 인권] 아시아는 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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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과 인권] 아시아는 공사 중?!
  • 한(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0.03.24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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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ICMICA), 우리신학연구소, 홍콩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가 공동 주최한 동아시아아카데미 “개발 시대의 민주주의와 인권”(Democracy and Human Rights under Construction)이 3월 4일부터 8일까지 홍콩에서 열렸다. 도시 (재)개발이 어느 한 국가나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한 국제연대 프로그램이다.

▲ 3월 6일 포럼에서 '용산참사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 발표하는 변연식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은 동아시아 각국의 젊은이들이 만나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영감을 얻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에서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예수살이공동체 등에서 11명이 참여하여 10여 명의 홍콩 참석자, 인도네시아 활동가 2명과 함께 홍콩에서의 특별한 닷새를 보냈다. 3월 5일과 7일에는 홍콩에서 (재)개발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대안을 모색해 온 활동가들의 안내를 받았고 주민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공식 일정의 둘째 날인 3월 6일에는 “개발이 소외된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어 한국, 홍콩,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서로 소개하고 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영되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나승구 신부와 천주교인권위원회 변연식 위원장이 용산참사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고속철도로 인해 흔들리는 일상

한국에서 ‘4대강 살리기’, 뉴타운 사업 등이 문제가 되어왔다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홍콩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는 고속철도(Express Railway, 약칭 XRL)였다. 홍콩과 선전, 광저우를 잇는, 즉 홍콩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이 고속철도는 중국이 추진하는 전국적 규모의 고속철도망 건설 사업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고속철도 건설에 찬성하는 홍콩 사람들은 국가적 고속철도 사업에 발맞추어 홍콩까지도 고속철도가 이어져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홍콩이 변두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 26킬로미터의 지하 고속철도 건설에 669억 홍콩달러(약 9조8천억 원)라는 거금을 들일만한 가치가 있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낡은 공동주택이 모여 있는 타이콕쯔이(大角咀, Tai Kok Tsui) 지하로 철도가 지나게 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안전 문제, 그리고 홍콩 외곽의 작은 농촌인 초이윈췬(菜園村, Choi Yuen Tsuen)이 ‘응급지원기지’(Emergency Rescue Station) 건설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들끓게 하고 있다.

3월 5일 오전에 방문한 타이콕쯔이는 건설된 지 수십 년씩 된 낡은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지역이었다. 이곳 약 20개 동의 공동주택 지하로 고속철도가 통과하게 된다. 홍콩 정부는 전문가들이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 “절대로 건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강조하지만 불안해하는 지역 주민들이 많다. 실제로 1977년 몽콕, 1983년 완차이에서 지하철 공사 중 주변의 토사가 무너지거나 땅이 함몰되는 사고가 일어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 세 들어 살거나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소시민들은 낡은 고층건물이 무너질까봐 불안해도 비싼 임대료 때문에 이사 갈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도 타이콕쯔이의 건물들은 너무나 낡아서 지하를 통과하는 터널 공사를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건물 꼭대기에서부터 깊은 균열이 생겨 거의 반으로 갈라진 건물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 고속철도 건설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초이윈췬의 모습.


오후에 방문한 초이윈췬은 홍콩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의 첫 인상을 말하자면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의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3호선 지축역 주변과 비슷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지축동보다는 지대가 넓은 느낌이고, 푸근하고 평화로운 농촌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에 맞서 열심히 싸워온 주민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았다. 그들에 따르면 초이윈췬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5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왔다. 고속철도 건설 계획에 따르면 초이윈췬 마을 자리에는 그 이름도 삭막한 ‘응급지원기지’가 들어선다. 지하에 철도시설이 들어서고 지상에는 군사시설이나 상업시설이 들어선다는 얘기도 있다.

▲ 고속철도 건설과 관련된 지역을 알리는 홍콩 정부의 공고문.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 용어로 쓰여 있다.
이처럼 개발이 지역 주민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 사이에 충분한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 홍콩에서도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홍콩 정부의 공고 방식이었다. 철도가 지나게 될 토지가 어느 곳인지 알리는 정부의 공고문을 타이콕쯔이와 초이윈췬 모두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코팅된 수십 장의 인쇄물이었고 법정용어로 토지의 위치와 면적이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초이윈췬 주민들은 대부분 자기가 살며 농사짓는 땅이 정부 문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많아서 정부의 공고문을 보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 주민의 설명이었다.

2009년 말 고속철도 건설이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 정부 측과 초이윈췬 주민의 갈등도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제시하는 대로 보상금이나 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주민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 작은 마을에 천 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는 2009년 10월 18일의 집회가 이 싸움의 중요한 한 장면이었다.

정부는 마을 주민들에게 이사할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거나 5~6만 홍콩달러를 보상금으로 제시하기도 했지만 주민 측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문제는 정부의 제안이 초이윈췬 주민들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삶의 방식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농경지 곁에서 친척,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온 주민들에게 아파트에 들어가 살라고 제시하는 것은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이는 무지를 넘어선 폭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주민들은 “땅 주변에서 살겠다”, “친척, 키우던 가축과 함께 살겠다”는 등 몇 가지 원칙을 정부 측에 제시했다. 그동안 살아온 농촌 공동체와 삶의 방식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10년 1월 16일, 홍콩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입법회(국회에 해당)에서 고속철도 예산안이 통과되었고, 2015~2016년 개통을 목표로 고속철도 건설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초이윈췬 주민들은 그들이 제시한 원칙들에 대해 정부의 반응이 냉담하며,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받을 보상금을 모아 어딘가로 함께 이주할 방안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런 상황 때문인지 초이윈췬에서 우리를 안내한 중년 여성은 변연식 위원장으로부터 몇 년 전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한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과 공동이주 사례에 대해 들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여성은 “중요한 것은 공동으로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이고, 그것이 협상의 힘을 가져다 준다”는 변 위원장의 조언을 진지하게 듣고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충분한’ 대화가 필요해

지난 몇 년간 광화문부터 피맛골, 숭례문, 시청 등 서울 도심 전체가 공사 중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홍콩에 다녀와서 드는 생각은 서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공사 중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식의 개발이 정말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것일까?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타이콕쯔이의 개발로 인해 이익을 보는 건물주들이 내건 환영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개발로 인해 집이 무너질까봐 걱정하거나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만국 공통의 문제일 것이다.

다른 나라 사정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정부와 해당 지역 주민 등 당사자들 사이의 충분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지 주민과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최선(最善)의 선택을, 최선이 아니면 차선(次善) 또는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도 찾아가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또한 만국 공통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