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 용산, 제주에서 4대강까지…왜 다시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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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참여] 용산, 제주에서 4대강까지…왜 다시 종교인가?
  • 엄기호(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0.05.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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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부터 4대강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아주 뜨겁다. 마산에서는 침묵을 서원한 수녀님들이 웃옷을 벗고 절규하는 할머니들과 함께한다. 제주에서는 주교님까지 나서서 범교구 차원에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돌려놓자며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87년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다음 세속의 일을 사회단체들에게 맡기고 종교의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던 종교가 다시 사회문제를 주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환경단체에서부터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무런 이슈도 주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처럼 사회가 10년 전, 20년 전으로 퇴행하다보니 벌어지는 일일까?

모두가 속물인 시대

우리는 우리 삶 전체가 ‘속물’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이야기가 속물들이 사는 이야기이다. 욕을 먹으면서도 막장 드라마가 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인기가 많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말이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대부분의 며느리는 아들 등이나 처먹는 존재이고 모든 시어머니는 일부러 며느리를 괴롭히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개그콘서트의 명코너인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매주 묘사하는 것처럼 여자친구는 남자친구를 벗겨먹기 위해 태어났고, 남자친구는 그것을 오로지 키스와 같은 것으로 바꾸려는 인간이다. 이들은 사랑과 같은 가치는 믿지 않는다. 남자는 찌질하고, 여자는 된장녀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속물이지 않는가?

그래서 속물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지난 학기에 만난 어느 대학생이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나는 이명박과 강기갑과 노회찬과 유시민을 잘 모르겠다. 그들이 정말 어떤 구체적인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섹스밖에 없다, 즉각적으로 기쁨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속물은 세세한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본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란 가치 따위는 없고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놈, 사기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치에 대해서 냉소한다.

그래서 지난번 김예슬이라는 고려대생이 대학을 거부하는 선언을 했을 때 이들은 3-40대와는 달리 오히려 더 불편해했고 냉소적이었다. 과거 같으면 자기가 다니는 대학이 어디인가와 상관없이 대학생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공감을 하며 연대를 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다수의 대학생들은 “너는 고려대를 다녔으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한다. 나아가 그런 선언을 통해서 사회운동이나 정치에서 한 자리 해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한다. 절대 아무도 안 믿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는 숭고함

그렇다고 이 속물들에게 아예 가치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외려 우리는 인터넷이나 중요한 사건이 터졌을 때 이 속물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근엄해지고 도덕적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김길태와 같은 흉악범 사건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이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인권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말하는 인권단체들을 비난한다. 교황청도 개인의 양심에 따른 권리라고 인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도 국가도 저버리는 놈들, 즉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이라고 비난한다. 따라서 짐승들을 처단하기 위해 사형제는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주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는 게으름만 키울 뿐이라고 반대한다. 이들에게 가치라는 것은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바꾸어가는 윤리가 아니라 남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이런 속물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아무리 모두가 다 도둑놈이라고 욕을 하다가도 모두가 숙연해지고 엄숙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감히 욕을 할 수 없는 그런 자신의 삶을 건 그런 존재를 만날 때이다. 진정한 존재 말이다. 그런 존재들을 비난하면 그 순간 속물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속물이 되어 다른 사람의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진정한 존재들에게 누구보다 더 엄숙해진다. 간간히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긴 하였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였을 때나 법정 스님이 열반하였을 때, 그리고 성직자들이 가난한 자들 혹은 파괴되고 있는 자연과 아픔을 공명할 때이다. 속물들마저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그런 진정성이다.

진정성이란 진짜로 믿는 데서 나온다. 이것은 속물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왜 천주교가 4대강을 반대하는가? 그것은 천주교는 창조질서라는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은 하느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허물어뜨릴 수 없다. 창조질서의 핵심은 생명이며 생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곧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천주교 신앙의 바닥이 흔들리는 사건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은 더 강경하다. 그렇다보니 종교에서는 삶을 내걸고,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이 사안에 대해 나설 수밖에 없다. 용산도 마찬가지였다. 천주교의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질서인 시장이 인간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도 버림받을 수 없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발과 무한경쟁에서 사람을 버리고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현재의 질서와 도저히 상생할 수 없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시장 경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왜 다시 종교인가? 아무리 낡고 부패한 종교라도 그 안에는 늘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 혹은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좋은 종교에서는 이들이 ‘산 증인’이고 나쁜 종교는 이들을 ‘알리바이’로 여긴다. 그래도 종교는 이들 진짜로 믿는 사람들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 종교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가치가 시장과 개발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이 순간 종교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아무리 나쁜 종교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나서는 진짜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자신의 근본이 부정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진짜로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들도 윤리가 있고 가치를 믿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삶에는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아무리 나쁜 교사도 아이들을 때릴 때 너희가 미워서 때린다고 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잘 되기를 바라서 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한다. 자신의 자식을 성폭행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무도 그냥 나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도 국가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는 않지 않는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에게는 그것이 진지한 것이건 알리바이이건 가치와 윤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지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4대강이건 용산이건 종교인들이 삶이 걸린 선택을 하였을 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숭고한 것이 모두 사라진 시대에 이들이야말로 그 숭고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인 셈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이중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편에서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한다. 우리는 진짜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진짜로 무엇을 믿고 있는가?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 다른 한 편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다른 이들에게는 삶의 알리바이가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로 믿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신앙, 그리고 남과 하느님 모두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