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걱정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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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걱정하는 남자
  • 설현천(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 변호사)
  • 승인 2010.05.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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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걱정을 사들인다. 수많은 사연의 걱정을 가진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구속된 남편의 아내, 이혼하려는 여자, 기획부동산에 사기를 당한 노부부 등.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고 그들의 걱정을 사들인다. 한마디로 나는 걱정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돈을 받는다”는 의미에서는 ‘프로페셔날’이니 일명 ‘걱정의 프로페셔날’이라고나 할까? 보다 그럴듯한 말로는 걱정의 ‘사무라이’(‘섬긴다’는 뜻의 일본어)라 해도 좋겠다. 나도 원래 걱정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고교 시절 시험 전날 그 많은 시험범위를 언제 다 공부할까 걱정하며 운 적도 많았다. 이런 울보에게 돈까지 주며 걱정을 맡기고 가다니….

걱정에도 급수가 있다

걱정하는 방법에도 일종의 기술이 있다면 걱정에도 태권도처럼 급수가 있을 것이다. 걱정의 초급자는 하얀띠 수준의 걱정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걱정을 머리에 싸매고 다닌다. 한 가지 걱정이 해결될 때까지 다른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가질 수도 없다. 온통 그 걱정이 해결될 때까지 발가락에 힘을 주며 걱정에 집중을 한다. 소위 ‘집중형’이다. 걱정의 중급자는 빨간띠 이상의 걱정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는 걱정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득 걱정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하면 걱정에 몰입하게 된다. 소위 조울증에 빗대자면 심각한 ‘울증’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소위 ‘발작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걱정의 상급자는 검은띠 이상의 유단자를 말한다. 그는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속으로 걱정을 삭인다. 소위 ‘백조형’이다. 마지막으로 걱정의 8단은 걱정에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신께 위탁하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소위 ‘위탁형’이다.

나도 원래는 집중형 걱정자였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뒤로 조금 수련한 결과 발작형 정도로는 발전하지 않았나 감히 스스로 평가해 본다. 예수님은 걱정 수준은 어디에 해당할까? 걱정의 8단? 아니다. 그는 걱정의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걱정의 신 자체”이므로 급수를 매길 수가 없겠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후로도 2000년 동안 수십억 인류의 걱정을 대신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걱정하는 남자”이시다.

다시 걱정은 시작된다

다시 월요일 아침이다. 샤워기에서 걱정의 물줄기가 온몸에 흘러내린다. 핸드폰이 아우성을 친다. 은행에 맡겨놓은 잔고를 확인하듯 주말동안 걱정을 잊었던 사람들이 나에게 맡긴 걱정의 잔고를 확인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요한 걱정하지 말고 내게 자네의 모든 걱정을 맡기게나.” 그런데 내 자신의 걱정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은 괜찮지만 돈을 받고 맡아 놓은 다른 사람들의 걱정까지 예수님께 맡기는 것은 상당히 양심에 찔린다. 내가 대신해 주겠다고 맡아놓은 걱정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맡기다니…. 의뢰인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무책임한 일이다. 그러나 걱정의 발작형인 내가 다른 사람들의 걱정까지 해주기는 너무 힘에 부친다. 그래, 뻔뻔해지자. 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 결심했어! 주님께 맡기는 거야! 하지만, 잘될지 걱정이다.

※이 글은 반포4동성당 소식지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