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와 인권] 흔들리는 인권위, 인선절차부터 바꾸자!
상태바
[국가인권위와 인권] 흔들리는 인권위, 인선절차부터 바꾸자!
  •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 승인 2010.07.21 1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권이 위기다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상찬에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50년 전만 해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인권과 민주주의까지 성취했으니 그네들이 보기에 이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인권과 경제발전,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밝혀낸 바 그대로 한국은 그 아름다운 조합을 보여준 세계의 모범사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도 아닌 나라에서 GDP와 국민소득의 목표치를 공약으로 내걸 때부터 뭔가 좀 수상하더니, 결국 성장은 지상목표가 되어 버렸고, 인권 같은 비경제적 가치들은 후순위로 밀려버렸다. 국민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이 위세를 떨치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 안전망은 점점 느슨해졌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공권력의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네티즌의 재기 넘치는 풍자와 유머는 검열의 대상이 되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소송의 위협에 시달리거나 ‘전문시위꾼’이라고 낙인찍혔다. 어쨌거나 2010년 대한민국은 다시 세계인권공동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모범 인권위에서 무기력 인권위로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이러한 정부의 역주행을 감시할 수 있는 똑똑한 조직을 하나 만들어두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2001년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이다. 사실 어떤 정권에게나 인권은 뒷전으로 밀리거나 기껏해야 장식품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러한 권력의 유혹을 국제인권기준에 따라 견인하고 견제하고자 탄생한 것이 바로 인권위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이 인권위는 설립 5년 만에 세계적인 ‘모범’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세계일류상품이 500개가 넘었다던데, 이제 ‘상품’뿐만 아니라, 인권영역에서도 일류제품을 하나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권위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이명박 정부는 이미 인수위 시절부터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화하려고 하더니, 작년에는 인권위 직원을 21%나 감축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력기구들이 인권위의 권고를 무시하는 경향이 늘어난 것은 당연지사다. 결국 안경환 전 인권위 위원장은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 “그렇게나 많은 나라의 시샘과 부러움을 샀던 자랑스러운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근래에 들어와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부끄러운 나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다“는 이임사를 남긴 채 사퇴하고 말았다. 그 이후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조직축소와 위원장 사퇴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인권위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피해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인권현안에 침묵하거나 최소한의 체면치레에 그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조직이 무기력에 빠진 것이다.

문제는 인권위의 ‘사람’이다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어떤 조직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선 보통 적절한 자금과 법적 강제력이 필요하지만, 인권위는 애초에 그런 힘보다는 인권위 구성원들의 인권에 대한 신념과 독립성에 대한 의지에 기반을 둔 조직이다. 인권위의 조직과 예산은 경찰서 하나 정도이고 강제권한 하나 없다. 하지만, 한 때 70%가 넘는 권고수용률을 이끌어냈던 비밀은 바로 인권위의 정치적, 도덕적 위상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버팀목은 인권위를 구성하는 ‘사람’이다. 인권에 대한 신념도 인권에 대한 경험도 독립성에 대한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인권위를 구성한다면, 인권위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인권위에 대한 세계적인 규범들이 하나 같이 인권위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권위원 인선절차는 그런 사람을 뽑는데 부적절하게 짜여 있다. 국회가 4인, 대통령이 4인, 대법원장이 3인의 인권위원을 지명/선출하게 되어 있는 현행법은 언뜻 보기에 절묘한 균형을 맞춰놓은 듯하지만, 인권위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세 권력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원성을 반영하는지의 여부이다. 또한 지명/선출에 대한 어떠한 절차규정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법에는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자”라는 자격요건이 명시되어 있지만, 지명권자들은 이 요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재량껏 지명권을 행사하곤 한다. 실제로 그동안 지명권자들은 법조인, 종교인, 언론인 등을 추천하면서, 직업성격상 당연히 인권에 대해 지식과 경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과연 위의 요건을 충족하는 인물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시민사회가 참여하거나 추천할 수 있는 기회는커녕, 의견조차 청취하지 않으며, 인선과정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된다. 인사청문회와 같은 검증절차도 없다. 현재 인권위원장의 임명절차는 행정부의 산하기관 기관장을 임명하는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선절차를 바꾸자

개혁방안은 간단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다른 독립기관들의 장을 임명할 때의 방법을 빌려오면 된다.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할 때 대법관추천자문위원회를 두고 있다. 대법원장의 자의적인 제청권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이다. 인권위원 지명/선출에도 얼마든지 비슷한 제도를 둘 수 있다. 대법원, 감사원은 물론 국무위원, 방통위 위원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을 임명할 때 인사청문회가 의무적으로 실시된다. 인권위원장도 당연히 청문회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가능하면 상임위원까지 청문회 대상으로 포함시키면 더 좋다. 이미 인권위원장을 인사청문회 대상자로 포함시키는 법안은 여러 차례 제출된 바 있다. 법 개정 이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대법관추천자문위원회도 법률이 아니라 내규에 의해서 설립한 기구다. 인사청문회와 유사한 공개적 검증절차를 국회, 대법원, 대통령실에서 자율적으로 실시할 수도 있다. 지명기관들의 의지만 있다면 다음 인선 때부터 당장 실험해볼 수 있다.

물론 나쁜 제도에서 반드시 나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인권위원 선임과정을 보면 지금의 허술한 임명절차에서도 훌륭한 인권위원들이 여럿 임명된 바 있다. 반대로 제도가 좋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추천자문절차에 따라 지명된 대법관, 인사청문회를 실시한 국무위원들 중에도 자격 시비가 일어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좋은 제도는 좋은 결과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적어도 인사청문회 때문에 인권에 대해서 무지한 후보자를 임명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는 해야 하고, 시민사회가 인선절차에 참여할 기회가 어떤 식으로든 보장되어야 한다. 아니 최소한 도대체 인권위원들이 인권에 대한 어떤 경험과 신념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따져 물을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한다.

강제력이 없고 조직과 자원이 부족한 조직이 힘을 가지려면, 그 조직이 좋은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고, 정치 환경이 어떻게 바뀌어도 인권을 옹호하는 독립기구로 살아남으려면, 인권에 대한 신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로 인권위가 구성되어야 한다. 인선절차의 개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