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인권] 장애인 복지 예산 확대를 넘어 장애등급제 철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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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인권] 장애인 복지 예산 확대를 넘어 장애등급제 철폐로
  • 구교현(전국장애인부모연대)
  • 승인 2010.09.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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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동결되는 장애인 복지 예산

장애인 복지 예산의 수준은 장애인 인권의 수준을 말해준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도 이를 현실화할 예산이 없으면 ‘말짱도루묵’이며, 실현되지 않는 정책은 인권의 후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복지예산은 OCE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만큼 복지 수준은 열악한 상태다. (장애인 복지의 수준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함에도 현 정부는 매년 복지 예산을 동결해왔다. 현 정부는 감세 정책으로 정부예산 규모를 줄여놓고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했고, 4대강에 수조 원을 쏟아 붓고는 예산이 ‘동’났다고 했다.

재밌는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된 내년도 장애인 복지 예산 중 장애 등급 재심사에 소요되는 예산만이 유일하게 100% 증액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애 등급 재심사는 현재 재심사를 통한 등급하락율 40%에서 알 수 있듯 기존보다 장애인들의 등급을 떨어뜨리고 장애인들이 받던 복지서비스의 양을 줄이겠다는 계획으로 추진되는 사업이다. 결국 현 정부는 특정 장애인 복지 사업 예산을 증액해 전체 장애인 복지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인 것이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장애아동 복지의 현실

한국의 열악한 복지 안에는 더 열악한 장애인 복지가 있고, 그 안에는 더 열악한 장애아동 복지가 존재한다. 장애아동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 자체가 거의 없고, 있어도 철저히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장애아동은 오로지 가족의 책임으로만 전가된, 또는 완전히 방치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올해 초, 대구에서 발생한 사설치료실 내 장애아동사망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열악한 장애아동 복지의 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재활치료, 돌봄지원 등과 관련한 정책요구를 가지고 복지부와 협의를 시작했고 복지부도 조금은 귀를 기울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8월, 정부예산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확인된 복지부 예산은 또다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장애아동 복지에 있어서는 예산삭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모들의 요구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부예산이 확정되기 전 부모들은 급박하게 투쟁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 8월 31일 장애자녀 부모 49명이 장애아동과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예산으로 보장하라고 촉구하며 종로 보신각 앞에서 집단 삭발했다. [출처] 비마이너(www.beminor.com)


여름을 뜨겁게 달군 부모들의 저항

17일간 단식농성, 49명의 삭발, 800여명이 운집한 결의대회. 부모들은 매일 국회를 오가며 이 문제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고 결국 정부여당은 이를 당론으로 약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예산이 최종 확정되려면 아직 많은 과정이 남았지만 예산확보를 위한 튼튼한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다. 더운 여름, 한때 34도를 웃돌았던 인권위 농성장은 땀 냄새와 사람냄새로 가득한 치열한 현장이었다.

이번 농성을 통해 부모들은 구체적인 장애아동 복지서비스 이외에 장애아동복지지원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기존 성인장애인 중심의 장애인 복지 환경 속에서 장애아동의 권리는 새로운 법률제정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장애등급제한의 문턱을 넘어 발달장애성인의 복지 문제로

한편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이라는 장애아동 복지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가는 속에서 부모들은 자연스럽게 발달장애성인 복지 문제와 만나게 되었다. 바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장애등급제도는 발달장애성인 복지의 확대를 결정짓는 관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모든 복지의 대상자가 1급에게만 집중된 현실에서 등급 제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정책도 대다수의 2-3급 발달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정부는 기존의 활동보조인서비스를 확대 개편해 다양한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 안에 발달장애성인 서비스도 일부 포함할 예정이라고 한다. 장애등급제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혹은 활동보조와 같은 개별서비스에 등급기준적용이 폐지되지 않는다면 최초로 시행되는 발달장애성인의 서비스는 여전히 1급으로 제한되고 말 것이다. 장애등급제 존폐 여부는 향후 발달장애성인 복지확대에 있어 일종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 9월 13일 중증장애인들이 서울 광진구에 있는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했다. [출처] 비마이너(www.beminor.com)


서비스의 확대를 넘어 구조의 변화로

장애등급제는 한국 장애인 복지의 구조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한국은 오로지 의학적 기준만으로 되어 있는 장애등급을 가지고 소득보장정책에도, 사회서비스에도, 각종 감면제도에도 적용하고 있다. 병원에 얼마나 자주 와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등급판정기준이 장애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결정짓는 제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장애등급제는 점수를 매기기 편한 의학적 기준에 행정편의주의가 결부된 제도에 불과하며, 이 제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장애인 개개인별 환경과 욕구에 맞게 보편적인 서비스가 제공되는 환경은 ‘먼 나라 얘기’에 불과할 것이다. 더불어 구조의 변화가 미칠 파장은 단순히 예산 몇 백억이 증액되는 성과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장애등급제와 같은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몇 백억의 예산증액도 앞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부모운동은 당장의 서비스 확대에 주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매년 지속해야 하는 과제이다. 그러나 이제 부모운동은 지금껏 모아온 역량을 기반으로 좀 더 근본적인 과제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 첫 관문이 바로 장애등급제도이다. 중증장애인당사자들의 문제제기를 통해 이제 장애등급제도는 우리사회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부모운동이 이를 적극 받아 안는다면 정부입장에서는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비스의 확대를 넘어 구조의 변화로. 구조의 변화를 위해 보다 폭넓은 연대로. 한 단계 도약하는 부모운동의 미래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