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률 0% 인권 변호사,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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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률 0% 인권 변호사, 영면하다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1.01.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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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명 변호사 11일 영면... 인혁당사건·김지하 반공법 위반사건 등 변호
▲ 이돈명 변호사의 빈소 ⓒ 윤영전


지난 11일 원로 이돈명 인권 변호사가 8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1922년 나주에서 태어나 1950년 조선대학교 정치과를 졸업하고 1952년 고시사법과 제3회로 1954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1963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 변호사는 1973년 대한변호사회 부회장, 1978년부터 1988년 사이 천주교 정의평회위원회인권위원장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 사이에 1970년대 민청학련사건과 유신에 맞서 투쟁한 학생들의 담당 변호사로 활약했다.

당시 황인성, 조준희, 홍성우, 조영래 같은 30대 인권변호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또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이란 수기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이 되고 3.1구국선언과 리영희 백낙청 교수의 반공법 변론을 맡기도 하였다.

이 변호사는 암울한 박정희 유신시절과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에 인권변호사의 맏형으로 당당히 활동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오원출 사건, 부산미문화원 사건, 오송회 사건과 86년 5.3인천사건에도 변호를 맡아 활발히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또 1990년대는 엔지오 단체의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여 '정의구현사회'를 위한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특히 (사)평화통일시민연대 고문으로 활약하며 거리의 시위에도 동참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와 국가를 제창하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염원했다.

2004년 1월에는 이 변호사의 전기 <돈명이 할아버지> 출판기념회가 명동성당 별관에서 열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와 변호사 등 가계인사가 참여해 성대하게 열렸다. 그날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나는 승률 0%인 인권변호사"라고 자청했다.

이 변호사는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소외받고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리고 정의롭고 진실된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변론을 자임했던 변호사였다. 함께 법조인이었던 유현석 변호사와는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유 변호사가 먼저 운명하자 죽마고우처럼 퍽이나 슬퍼했다.

그날 83세의 노익장 변호사 '돈명이 할아버지' 평전 출판기념회에는 그와 암울했던 유신시대로부터 민주화 과정의 시대에 함께 한 법조계 인사들과 그가 변호를 담당했던 인혁당 사건부터 지금의 송두율 교수 사건의 당사자와 가족들이 많이 참해 축하했다.

박형규 목사와 조준희 변호사, 백낙청 교수, 함세웅 신부는 간단한 축사를 통해 그가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인간적인 정과 더불어 피고인들의 변호를 해주었고, 가족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아 존경받는 원로 변호사였음을 상기시켰다.

▲ 생전의 이돈명 변호사 모습 ⓒ 윤영전


<돈명이 할아버지>라는 책의 400여 페이지에는 농촌의 촌놈이 독학의 길을 걸어 평범한 법조인이 되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 있다. 내용에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압살한 군사문화와 74년부터 유신의 칼날에 맞서 싸워온 많은 민주인사의 형사사건들을 기꺼이 변론했다'고 적혀 있다.

1974년 4월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과 김지하 시인 오적 사건 등에 영향을 받아 이돈명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로 뛰어든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이 변호사는 여러 시국사건과 김재규 사건 등을 변호했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맡다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된 이부영 의원을 은닉한 죄로 안기부에 연행 구속되어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에서 법이 무시되고 권력을 이용해 옥죄는 현실을 보면서 인권변호에 뛰어 들었다. 그동안 많은 사건을 맡아 최선의 변론을 다했지만 결국 무죄를 단 한 건도 얻어내지 못하고, 유죄 판결만을 남긴 유일한 변호사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정의 앞에 당당히 나서 변론을 했기에 피고인이나 주변에서 이해해 줬다고 회고했다.

특히 이 변호사는 "민주주의 투쟁이나 기타 반독재 투쟁을 하지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변호사로서 고통 받고 권력에 짓눌린 인권문제를 방관할 수 없어 변호했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 후 1990년에는 분단을 극복하는 평화통일 운동에도 원로로 참여했다.

이 변호사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는 군사독재로,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주의 방향으로 전진해 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들 스스로 대견해 하고 또 앞으로 발전적인 민주주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낙관론으로 희망을 이야기했다.

일부 정치인들도 자리를 함께 했지만, 그는 정치적인 얘기는 접고 오직 인권이 살아있는 아름답고 정의로운 이 사회의 공동체를 위해 힘쓰자고 강조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언제나 너털웃음을 보이며 스스로 촌놈이라 하지만 대한민국에 제일가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했고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는 인화와 화합으로 학교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또한 이 변호사는 '거시기 등산회'를 40년이나 이끌어 오면서 건강관리에 힘쓰고 근간에 암과의 투병에도 굴하지 않고 너털웃음으로 출판기념회장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라고 천연한 마음으로 줄곧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그런 여유를 가졌던 이 변호사는 노환으로 운명했다. 분명 하느님 나라에 드시고 평안히 영면하실 것이다. 필자는 몇 달 전에 잠깐 뵈면서 걸음걸이도 많이 약해지신 모습에 더욱 건강하시어 평화통일의 그날까지 장수하시기를 말씀드렸으나 여한이 없다 했다.

법이 없어도 이 변호사님의 세상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일 것이었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이 빨리 오기를 간구하시면서 우리에게 한반도 평화를 이루고 통일을 앞당기라고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웃음 띤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오마이뉴스> 윤영전
11.01.13 14:03 ㅣ최종 업데이트 11.01.13 14:0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8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