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따가운 햇볕 속의 느티나무처럼, 형님은 안식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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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따가운 햇볕 속의 느티나무처럼, 형님은 안식처였습니다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11.01.1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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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명 선생님.

아니 형님! 따가운 햇볕 속의 풍성한 느티나무처럼 형님은 우리의 쉼터요, 안식처였습니다.

오늘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망연해하고 있습니다. 둘째 동헌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더니 침상에는 평소 주무시듯 그처럼 편안한 잠을 자고 계시더이다. 얼굴을 만져도 손을 만져도 체온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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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에 초대합니다금년 들어 소한땜이 유달라서 금요일마다 찾아 뵙던 일을 혹한이나 지난 후 뵙자고 하고, 며느님께 당분간 사무실에 나오시는 걸 중단해달라고 부탁을 하고도 저희들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평소 금요일을 그처럼 기다리셨다니 말입니다. 정초 백인 형과 세배 겸 집으로 방문하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이것 저것 바쁘다는 핑계로 미룬 것이 결국 한이 되었습니다.

30년이 넘는 형님과의 인연 속에 저는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웠습니다. 저에게 주신 과분한 사랑은 저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남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마음과 처신들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형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유신과 신군부정권의 서슬하에서도 모두가 기피하던 시국사건들을 스스로 자임하고 맡으시던 용기, 그것도 한 두건이 아닌 당시의 공안사건은 거의 다 맡으신 것에 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저에게 주신 ‘헌쇠’라는 호가 바로 그러한 뜻이었음을 이제 알듯 합니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언론사와 대학에서 밀려난 교수, 기자들이 알음알음으로 찾아 모인 곳이 거시기산악회였습니다. 송건호 리영희 변형윤 유인호 백낙청 박현채 강만길 고은 조태일 등과, 얼마 후 딴살림을 낸 성래운 김진균 안병직도 초기에는 거시기산악회에 합류해 다녔는데 20여명이 넘는 대식구가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하고 배려함에 소홀함이 없으셨고,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는 이 분들에게 언제나 그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맏형 노릇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 분들이 복직되자 당신께서 더 기뻐하시며 술을 사고 밥을 사고 그러셨던 일들이 어찌 남에게 그러하겠습니까?

인혁당사건의 관련자들이나 그 유족에 대한 관심은 마치 내 식구 내 피붙이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김정남의 제안으로 천주교인권위원회 안에 인혁당진실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문정현 신부와 공동위원장을 맡고, 김형태 변호사를 실무간사로, 인권위 구성원들의 힘으로 수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인혁당사건은 32년 만에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저는 가해자가 지배하는 현실에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당신의 진실추구를 위한 용기와 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형님!

우리에게 남기신 이 유산 소중히 간직하고 이웃과도 나누어 갖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지어주신 ‘헌쇠’, 진정한 헌쇠이게 노력하겠습니다. 저승에 가시더라도 어두운 이 땅을 헤쳐나가는 저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부디 부디 명복하십시오.


박중기(헌쇠) |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


<경향신문>
입력 : 2011-01-13 21:21:51ㅣ수정 : 2011-01-13 21:21:5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32121515&code=1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