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인권] 연대와 강정
상태바
[평화와 인권] 연대와 강정
  •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서울
  • 승인 2011.10.24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대는 진정한 도덕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연대는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이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한다.” 연대는 정의의 영역 안에 자리하므로 근본적인 사회적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탁월하게 공동선을 지향하는 덕목이고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다.”(193항)

우리 가톨릭교회의 교리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설명이 장황하지만, 사실 ‘연대’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를 고백합니다. 창세기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세상과 하느님의 연대를 장엄하게 풀어갑니다. 하느님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세상 사이를,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는, 연대의 실종, 곧 죄악의 구조를 가져옵니다.

예언서는 줄기차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훼손하는 불의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정과 정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짐으로써 고아와 과부와 몸 붙여 사는 이방인의 눈에서 피눈물 흐르게 하고, 대신 자기들의 탐욕을 채웁니다. 연대의 실종은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을 이민족의 억압에 놓이게 하고, 하느님을 욕보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날을 고대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의 연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며,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분은 이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감옥에 갇히고 병들어 누워있는, 무력하고 자기 목소리 내지 못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만을 위한 혼인잔치가 아니라, 고을 어귀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나,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를 혼인잔치에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십니다.

그분의 행적은 전부 이런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준 이들을 열거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부질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 세리와 죄인, 앞 못보는 사람, 손이 오그라든 사람… 전부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처럼 그들을 마을 밖으로 내몰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만나러 길을 나서십니다. 그런 허접한 이들을 위해 그분은 몸소 가난과 박해의 길을, 비움과 버림의 길을,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제주에, 가장 작은 고을 가운데 하나인 강정에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구약과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연대가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며,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강정의 현실은 목마르고, 배고프고,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감옥에 갇히고, 병들어 누워있는, 한없이 무력하고 자기 목소리 내지 못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처지에 놓인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강정의 현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영원한 벌의 갈림길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연대는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이다.”

강정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면,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 선택적 무지, 혹은 의도적 무지일 수 있습니다. 자기 탓 없는 무지와는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강정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는 하지만,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 근심, 혹은 무관심 내지 의식적 외면의 태도는 연대의 정신을,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신앙, 부도덕함일 수 있습니다.

강정을 민주주의와 평화의 시대적 징표로 삼아 복음의 빛을 비추어 공동선에 투신하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 곧 연대의 실현입니다. 이는 우리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사목헌장)이며, 주님을 부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의 발걸음 앞에 하느님의 축복과 영원한 벌의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개개인과 민족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죄의 구조는…연대의 구조로 정화되고 전환되어야 한다. (193항)


※2011년 10월 10일 강정포구에서 봉헌된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생명평화미사’의 강론문을 전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