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와 인권] 애증에서 무관심, 분노의 인권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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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와 인권] 애증에서 무관심, 분노의 인권위로
  •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 승인 2011.11.2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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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 10년을 돌아본다
국가인권위원회 10년을 돌아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10년이면 잔치가 되어야 할 것인데, 국가인권위원회조차 10년 잔치를 내놓고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10년 동안 그래도 우리 사회에 국가인권위가 필요하다는 존재감 같은 정도는 있었는데, 지금의 현병철 국가인권위는 지난날의 성과마저도 갉아먹는 참담한 지경으로 전락한 채 인권활동가들이 몰려올까봐 노심초사하는 초라한 모습이다.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원회”

11년 전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든다고 연말연시를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에서 천막도 없이 밤낮을 보내며 노상단식농성을 했던 때가 생각난다. 살을 에는 한겨울의 세찬 바람과 폭설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버티며 외쳤던 구호는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원회”였다. 그리고 정말 국가인권위원회가 2001년 11월 25일 탄생했다.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출발을 기껍게 환영하지 못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출범을 준비하였던 측이 함께 했던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무진 없이 출발한 국가인권위에 첫날부터 인권침해와 차별 진정이 밀려드는 것을 보고는 국가인권위가 제대로 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2002년 6월에는 내가 속했던 인권운동사랑방은 국가인권위원회와 일체의 협력을 거부하기로 선언했다. 국가인권위가 민간 인권단체들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만들 생각은커녕 인권활동가들이 자리나 바라는 사람들처럼 모욕까지 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구이기는 하지만 민간 인권운동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가야 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국가 속의 NGO와 같은 존재다. 국가기관에 고립된 국가인권위가 민간 인권운동진영의 지지와 협력을 얻지 못할 때 그 힘과 권위를 얻기는 너무도 힘들다.

그럼에도 국가인권위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인권사각지대인 감옥, 사회복지시설, 군대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직접 조사도 하고, 면전진정도 받고 하면서 이들 폐쇄적인 공간의 문제를 사회화하고 개선해갔다. 나아가서 아주 많은 수는 아니지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권고를 내서 정부 부처들과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반대 의견이 나오고,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국가인권기본계획(NAP),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권고 등을 제기하였고,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국가인권위가 사법적인 잣대가 아닌 인권의 잣대로 인권 기준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국가인권위와 독립성

어느새 인권침해가 발생하면 국가인권위를 떠올리게 되었고, 거기로 달려가 진정서를 접수하고는 했다. 인권단체들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국가인권위에 자문위원으로 참가하면서 공동의 활동을 하는 방향도 모색했고, 프로젝트도 진행하기도 했다. 내가 몸담았던 인권운동사랑방은 단 한 건도 국가인권위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지만, 인권 영역의 프로젝트가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 사회에서 이런 프로젝트 참여는 인권단체들이 재정적인 도움이 없어서 할 수 없었던 많은 연구와 조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어찌됐든 인권단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가인권위 정도는 되었던 게 안경환 위원장 시절까지는 그랬다. 그러면서 국가인권위는 성차별시정과 장애인차별시정기구의 역할까지 하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하게 되었다.

물론 그때 대통령들이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화한다거나 직접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정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래서 국가인권위가 필요한 것이라고 두둔해주고는 했다. 법적으로 미약한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을 대통령이 나서서 지켜주는 이런 상황은 이명박 정권에서는 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인권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현병철이 국가인권위원장이 되고는 독립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정부와 집권여당이 바라는 바대로 북한인권전담기구를 자처하게 되었고, 정부의 안대로 조직을 20%나 축소하여 전문성을 갖던 민간 별정직 공무원을 퇴출시키더니 지난해에는 계약직으로 일하던 조사관을 하루아침에 잘라버렸다. 이렇게 되자 상임위원, 비상임위원들이 사퇴하고, 민간 자문위원들이 사퇴하고, 장애인단체들을 중심으로 인권단체들은 현 위원장 사퇴를 내걸고 점거농성 등의 항의 행동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 활동가 우동민 씨가 숨지는 안타까운 일들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항의행동에 나섰던 국가인권위 직원들에 대한 징계가 진행되는 등 내홍을 겪으면서 안팎으로 비난을 받는 국가인권위가 되었다.

문제의 원인은 이명박과 현병철?

사실 국가인권위에 대한 인권활동가들의 태도는 애증의 관계로 요약된다. 국가인권위가 잘못하면 속상하면서도 애틋하고, 그러면서 헛발질하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짓을 할 때는 증오하는 그런 마음의 태도라고나 할까. 국가인권위가 또 다른 사법기관처럼 구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실정법과 법원 판례를 넘는 인권의 잣대로 인권침해와 차별을 진단하는 그런 모습과는 동떨어진 모습에 실망하고, 관료 조직화하는 모습과 성과주의적인 모습, 싸울 때는 싸우지 않고 적당히 타협해가는 모습에 실망을 하면서도 그래도 그때까지는 애증의 단계였다.

그렇기에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려고 기도하자 나를 비롯한 인권활동가들은 다시 명동성당 들머리에 주저앉아서 항의했다. 그런 항의에 국제사회도 동조하자 슬그머니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이명박 정권은 방식을 달리하여 국가인권위를 장악했다. 현병철은 그를 위한 선봉장 역할을 착실히 해냈다. 온갖 비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귀를 틀어막고 자기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나갔다. 요직에는 자신들의 심복을 배치하고,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던 직원들을 잘라 내거나 배제시켜갔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모든 문제는 마치 이명박 정권과 현병철 위원장 때문에 생긴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럴까? 이전의 국가인권위는 만족할 만한 국가인권위였을까? 앞서도 지적하였지만, 국가인권위는 인권침해와 차별이 일어나는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니면 미적지근하게 대처하고는 했다. 인권단체들을 적극적인 파트너로 삼으려는 노력도 별반 기울이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도 모자랄 형국에서도 종종 침묵하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시민사회의 신뢰와 지지 속에서 든든한 우군을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국가인권위는 약체 국가인권위가 될 소지가 다분했고, 국가인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가 대통령이 되자 곧바로 그렇게 되었다.

물론 국가인권위의 오늘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내부에서 소수지만 직원들이 국가인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고 있고, 아직도 국가인권위를 평가하면서 애정을 거두지 않은 인권활동가들이 있고, 이와 함께 인권센터를 건립하여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가인권위는 실망스럽지만, 다시금 국가인권위를 세우려는 노력이 꾸준히 경주된다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권조례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과 맞닿아서 새롭게 정립해갈 수 있을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

국가인권위 10년, 앞에 보이는 국가인권위를 넘어서 우리 사회 인권의 발전을 위한 전망을 고민해보아야 할 때다. 현재의 국가인권위가 지속될 수는 없고, 그렇게 놔두는 것은 인권운동이 제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