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인권] 우리는 '절단의 시대'를 살아간다.
상태바
[연대와 인권] 우리는 '절단의 시대'를 살아간다.
  • 이진경 (수유너머N 연구원)
  • 승인 2012.10.31 16: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2012 생명평화대행진 (사진_Wooki Lee)

모든 절단이 다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절단은 어쨌건 절단하는 자의 목적에 맞추어 무언가를 이용하거나 팔아먹거나 하려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사람이 나무를 절단할 때, 그것은 집을 짓기 위한 것이든 가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그냥 목재로 팔아먹으려는 것이든, 자기 목적에 맞추어 나무의 생존을 절취하는 것이고, 나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흐름을 절단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절단당하는 것은 생명을 지속할 권리를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보면, 지구상의 생명체가 먹고 살기 위해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어떤 것의 절단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중해야 하고, 가능한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 아주 처참한 '절단의 시대'를 살고 있음이 틀림없다. 동계올림픽을 위해 거대한 숲을 절단하는 것은 그만두고, 골프장을 짓기 위해 강원도의 엄청난 나무들을 대대적으로 절단하고 있는 것은 굳이 나무의 입장에 서지 않아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처참한 절단이다. 수십억 년을 거기 있어왔던 강정의 바위를 조각조각 절단하는 것은 또 어떤가? 모든 가치에 대한 고려를 묵살하고 거기 살아온 사람들의 모든 항의를 틀어막으며, 굳이 그 거대한 바위를 절단하면서까지 거기에 군사기지를 지으려는 이유를 납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을 납득시키려는 시도를 그들 스스로 아예 포기해버렸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일 것이다. 전국의 강들을 조잡한 보들로 절단한 것도, 그 강 인근의 땅들을 절단해서 다시 이어붙이기도 힘들게 콘크리트를 처발라 놓는 것도 그렇다. 수많은 생명들의 거처를 절단내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미친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걸로 없애주겠다던 홍수와 가뭄은 오히려 더 험한 얼굴로 덮쳐왔고, 그걸로 살려보겠다던 경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절단의 시대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 아닌 것을 겨냥하기에 놓치기 쉬운 이런 절단과 달리, '인간', 자기들 스스로 같은 피를 나누었다고 말하는 '국민'들을 겨냥하고 있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절단들도 있다. '재개발'의 깃발 아래 거기 살던 이들을 절단하여 쫓아내고, 그에 항의하는 이들을 '테러범'으로 간주하여 화염의 궁지 속에 몰아넣고는 과감하게 생명마저 절단내버린 용산의 참사, 그 처참함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많은 이윤과 좀 더 손쉬운 통제를 위해 '위기'를 과장하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절단해 쫓아내고, 그에 항의하는 이들을 극약 이상의 최루액과 고압의 전자봉마저 앞세워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쌍용자동차 공장의 경찰들, 그 절단의 끄트머리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절단 나버린 22명의 가슴 아픈 죽음들, 그 처참함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절단이 죽음을 뜻함을 보여주면서 1년의 시간을 35미터의 고공에서 목숨을 걸고 항의했기에 어렵게 '승리'했던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조차 아직도 절단된 상태 그대로 아닌가?

법원의 복직판결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면 값싸게 불려갔다 필요 없으면 쉽게 버려지는, 이미 절단의 운명 속을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담함이 어찌 현대자동차만의 일이라고 할 것인가! 송전탑을 세우겠다며, 70평생을 살아오던 농민들의 땅을 절단하여 갈취하고 그에 항의하는 이들의 목숨마저 절단내며 덤벼드는 이른바 '공기업'의 끔찍함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절단의 시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절단의 시대는 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삶을 절단하여 착취하고 팔아먹는 것이 경제적 '공공성'과 정치적 '합법성'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뻔뻔스런 시대다. 생명이란 어떤 것도 혼자서 고립된 채론 지속될 수 없음을 안다면, 다른 이웃한 것들과의 상호적이고 순환적인 관계 속에서 영양과 호흡, 생산과 활동의 흐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안다면, 이러한 절단의 시대란 '생명'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의미에서 '죽음'의 시대임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무들만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마저 절단되어 죽음으로 밀려가는 시대,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처참한 절단의 시대인 것이다. 모든 것이 절단의 거대한 칼날 아래 생명의 권리,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모든 권리를 절단당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명박이란 이름이 이러한 절단을 대대적으로 증폭시켰음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그 이름만으로 국한될 것인가! 대통령 하나 바뀌면 이 모든 것이 조용히 끝나고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만큼 순진하고 어리석은 오해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 때문에 더더욱 강조해 두어야 한다.

절단에 대항하는 연대

그러나 어떠한 희망조차 왜소하고 무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 참혹한 시대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행되는 이러한 절단에 대항하여, 끊어진 것을 다시 잇고 절단된 것을 다시 연결하여 다시금 생명의 흐름이, 새로운 삶의 흐름이 흐르게 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는 끊어진 강을, 절단 난 대지를 다시 잇고자 4대강 인근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사람들의 흐름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구럼비 바위가 '거기-그대로-있도록' 하기위해 거처를 옮겨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흐름이, 몸을 던지며 절단의 장치들과 싸우는 함성들의 흐름이, 비행기를 타고 반복하여 찾아가는 사람들의 흐름이, 그들을 위해 전국에서 보내진 돈과 물자의 흐름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높이만큼이나 고독했을 절단된 삶을 위해 희망의 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몰려갔던 사람들의 흐름이 있었음을, 그 높은 곳에서 방사되는 소리없는 외침을 실어 나르며 거대한 목소리로 증폭시켰던 전파의 흐름이 있었음을, 그 목소리에 응답하며 서로 연결되던 거대한 연대의 흐름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절단된 목숨들이, 중천을 떠돌던 23명의 영혼들이 다시 이어지면서 그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마음들을 불러내는 것을 보았다. 그 죽음을 야기한 절단에 분노하는 마음들이 이어지며 그 영혼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을 보았다. 또 한 편의 영화를 핑계로 용산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향해 10만을 넘는 대중들이 합류하면서 이어지는 멋진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용산에서 쌍용, 강정을 하나로 잇는 새로운 통로의 창안을 보았고, 그 통로를 따라 절단된 영토 안에 갇혀있던 힘과 에너지, 감정과 활동이 범람하면서 새로운 연대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필경 고립 속에서 연대를 향해 내뻗은 다른 손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그 손들을 이어 생명의 힘이 흐르게 할 것이다.

절단에 대항하는 이 연대들을 통해, 우리는 연대란 절단된 것들이 다시 연결되며 하나의 흐름이 되도록 만드는 것임을 새삼 주목하게 된다. 연대란 이처럼 무언가를 잇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절단에 반대되는 것이며, 절단에 의해 야기되는 죽음과 반대로 생명의 흐름을 다시 잇고 연결하는 것이다. 절단에 맞서, 서로가 순환적으로 물고 물리면서 살아가는 생명의 순환계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생명이란 처음부터 항상-이미 연대였던 것이고, 지금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연대는 죽음 같은 절단에 대항하는 생명의 힘인 것이다. 생명의 흐름을 만드는 연대, 그것은 이 절단의 시대를 사는 최고의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10월 5일 제주도 강정에서 시작하는 한 달간의 '생명평화대행진'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그것은 전국을 돌면 끊어진 채 각각의 절단과 고독하게 대결하고 있는 지역을, 사람들과 활동들을 하나로 잇고자 하는 거대한 연결과 연대의 시도다. 그것을 통해 생명의 기운을 되살리고, 삶의 활기를 다시 촉발하여 즐거운 삶의 가능성을 향해 사람들이, 아니 살아있는 것들 모두가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려는 기쁜 시도다. 생명의 소중함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죽음 같은 절단에 분노하는 모든 이들이, 삶의 기쁨을 찾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이 생명의 흐름에 함께 하기를! 그들과 이 멋진 생명의 행진 속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