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 없는 사과는 오만하고 공허한 독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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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규명 없는 사과는 오만하고 공허한 독백입니다
  • 이호중_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천주교인권위 상
  • 승인 2014.04.3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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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간첩조작사건에 대하여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자마자 바로 다음날인 4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정원의 증거조작 사건에 대하여 사과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의 허점이 드러나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같은 날 남재준 국정원장은 “일부 직원이 증거 위조로 기소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원장으로서 참담하고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TV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하루빨리 무마하려는 조급한 정치적 계산뿐이었지, 진심어린 사과라는 느낌은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사과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피해자와 듣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어야 진정한 사과겠지요. 국민의 마음에 ‘통’하는 사과의 진정성이 느껴지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 그 실체적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안함이 상대방의 가슴에 닿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와 개과천선하려는 노력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갖춰질 때에만 사과하는 이는 상대방의 용서를 구할 ‘자격’이 생깁니다. 간첩조작사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과는 어땠나요.

증거조작 사건에 관하여 4월 14일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는 진실규명 노력을 다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대목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몇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검찰은 국정원 협력자인 중국 국적의 김모씨와 국정원 대공수사국 김모 과장(4급)을 구속 기소하고, 주선영총여사관에 파견된 이모 영사(4급), 대공수사국 이모 처장(3급, 대공수사팀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권모 과장은 시한부로 기소중지되었고요. 이들은 유우성씨의 출입경기록을 위조한 후에, 그 사실이 발각될까봐 제2, 제3의 위조행각을 이어갔습니다. 내부 기획회의까지 해가면서 말입니다. 선양총영사관을 통해서 중국 허룽시 공안국에 출입경기록 발급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진행되자, 이들은 허룽시 공안국 명의의 발급확인서를 바꿔치기하는 사악한 수법도 동원했습니다. 위조와 사기를 전문으로 하여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범죄집단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범죄집단과 다를 바 없는 위조를 거듭한 국정원

 

지난해 12월 유우성씨 사건 항소심 법원이 중국 당국에 3개 문건의 진위 여부를 조회하는 공문을 보냈을 때 아마 국정원 직원들은 속으론 뜨끔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그래도’ 위조행각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국 당국의 회신이 온 2월 14일 즈음에도 국정원은 또 다른 문건(중국 옌벤 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명의 출입경기록 1부와 장춘시 공증처 명의 공증서 2부)을 위조하고 있었답니다. 이쯤 되면 죄질이 장난 아니게 최악이네요.

검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이 모든 조작이 3급 팀장과 부하직원들 선에서 이루어졌답니다. 엄격한 위계질서의 국정원에서, 그것도 첩보를 다루는 비밀정보기관에서, 위조사실이 들통 날까 두려워 조작에 조작을 거듭하는데, ‘윗선’은 몰랐다네요. 이번 증거날조에 수만 위안의 돈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결재한 국정원 대공수사단장(2급), 대공수사국장(1급)은 몰랐답니다. 이런 수사결과...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우성씨 사건의 수사와 공소유지를 담당한 검사들에 대해 무혐의처분을 한 것도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검사들은 위조사실을 정말로 몰랐을까요. 유우성씨 항소심 재판에서 검사들은 중국 지린성 공안청에 협조공문을 보냈다가 거절당했더랍니다. 그런데도 '정상적인 외교절차를 통해 공문을 발송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여러 차례 제출했다지요.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검사들이 무슨 이유로 법원을 속인 걸까요, 석연치 않네요. 또 국정원 직원들이 중국 허룽시 공안국 명의의 발급사실확인서를 날조하고 팩스번호를 조작한 뒤 팩스번호가 다른 두 개의 문건을 보냈을 때 검사들은 아무런 의심이나 확인도 안 한 채로 그냥 법원에 제출했다지요.

 

검사들은 무슨 이유로 법원을 속인 걸까

 

이것뿐이 아닙니다. 유우성 씨 1심 재판 때, 국정원은 유씨의 북한입국 사실을 입증할 증거로 유씨가 북한에서 촬영한 것이면서 사진 몇 장을 제출했습니다. 유씨와 변호인들은 그 사진이 중국 연길시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1심 법원에서 검증한 결과, 유씨의 주장대로였습니다. 디지털 파일로 된 사진들은 조금의 기술적 수단을 동원하면 촬영장소와 시각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검사들은 왜 손쉬운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일까요. 게다가 검사들은 유씨가 그 시기에 중국에 있었음을 주장하는 증거로 제출한 사진 등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는 하나도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더군요.

검사들의 우연적인 실수나 직무소홀 정도로 취급하기엔 너무 많고 연속적인 실수들이네요. 이쯤이면 그냥 실수가 아니라 국정원의 증거조작에 적극 협력 내지 방조한 혐의가 인정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국정원의 증거조작에 적극협력하고 방조한 검찰

 

검찰의 수사결과발표를 보면, 수사현장에서 ‘몰랐다’는 피의자들의 항변이 이토록 존중받는 줄 정말 몰랐습니다. 국정원 윗선 간부들도 몰랐고, 유우성씨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관여한 검사들도 몰랐다 하고, 증거조작사건을 수사한 윤갑근 수사팀장은 ‘피의자들이 몰랐다는데 어찌 하란 말이냐’는 투였습니다. 살인사건에서 피의자가 살인의 고의를 부인하면 ‘그러냐, 잘 알았다’고 할 검사가 과연 있나요. 사건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입증할 수 있으므로, 수사기관은 그러한 입증노력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 증거조작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이 때 정황사실의 판단은 국민들의 건전한 상식에 입각해야 합니다. 동료 검사를 감싸려는 측은하고 애틋한 심정에 기대어 판단을 그르쳐서는 안 되겠지요. 제가 갖고 있는 상식에 비추어 보면, ‘유우성씨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관여한 검사들은 국정원의 증거조작 가능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입니다. 아마 대다수 국민들의 상식이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사과의 두 번째 조건을 살펴보지요.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하는 등 위법한 수사를 통해 간첩사건을 조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1970-80년대에 자행된 많은 간첩조작 사건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와 사법부의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 월북자 친척을 둔 사람들, 재일동포들이 간첩조작의 주된 희생자였습니다. 어떤 식이건 북한과 조그마한 인연의 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에는 탈북자들이 국정원 간첩조작의 사냥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불행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간첩조작사건이 반복되는데, 정부는, 청와대는, 국정원은, 언제 한번이라도 정말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진정어린 사과를 한 적이 있나요. 간첩조작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무슨 개혁 노력을 했나요.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간첩조작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정원과 정부, 청와대는 무슨 노력을 해왔나

 

지금도 변한 게 없습니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적당히 사과 몇마디로 넘어가려 합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과거 잘못된 관행을 완전히 뿌리뽑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뼈를 깎는 개혁”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증거조작을 관행으로 해 왔다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만, 그가 말한 “뼈를 깎는 개혁”이 결국에는 국정원의 수사권한 강화라고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황당한 기분이 듭니다. 무고한 시민을 졸지에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날조를 일삼은 원인이 바로 국정원의 통제받지 않는 비밀권력, 특히 수사권 때문인데, 그것을 오히려 강화하겠다니요?

 

“신념에 의한 증거위조는 날조가 아니”라는 검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그들만의 잘못된 신념

 

국민의 요구와 반대로 가는 그들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요. “간첩 잡으려 불철주야 뛰는데 죄인 취급한다”는 국정원 진적 직원들의 불만의 목소리에 주목해 봅시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해 국가보안법상 날조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윤갑근 수사팁장은 국정원에서는 유우성씨가 간첩이라고 굳게 믿고 증거를 위조한 것이니까 ‘날조’는 아니라고 했던 말도 되새겨 봅시다. 나는 이런 말들에서 ‘그들만의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는지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우성씨는 진짜 간첩인데, 그깟 서류 몇 개 조작한 거 가지고....’ 이런 식의 생각이 문제의 근원인 것이지요. 진짜 간첩이라고 생각하면 증거를 위조할 게 아니라 떳떳하게 진실에 입각한 증거를 내놓으면 됩니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심증’에 근거하여 수사권을 휘두르고, 게다가 증거조작까지 해가며 그들만의 심증을 증명하려 하고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법치주의와 인권보장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주범입니다. 비겁하게 뒤에 숨어서 증거를 조작하고는 국민들 앞에서 ‘국익’ 운운하는 그들의 생각이 제일 위험한 것이지요. 바로 그래서 모든 권력은 바로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실규명과 법적 책임, 그리고 개혁이 빠진 대통령 사과

증거조작 사건에 대하여 특검을 통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련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고, 국정원의 과감한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대국민 사기’이자 ‘오만함의 극치’라고 감히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