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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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이묘랑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 승인 2014.05.29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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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밀양이 전하는 열다섯편의 아리랑』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어.”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연일 특집방송이 이어지자 한 지인의 카톡방에 올라온 글이라고 한다. 먹먹함과 함께 화가 왈칵 치밀었다.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구조는 더디기만 하고 진상파악은 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느리다.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이는 무엇을 그만 두라고 한 것일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슬픔과 무기력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걸까. 단 한 사람도 구조해내지 못한 채 자리 지키기에만 연연하는 정부 책임자들, ‘순수 유족’ 운운하며 유족을 미행하고 범죄자 취급하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일이 비참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바로 ‘세월호’에 다름없다는 것이 너무 무서워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목숨마저도 너무 가볍다. 오히려 그로 인해 짓눌린 내 어깨만이 천근만근 무겁고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고 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아무리 그 마음을 헤아려 보려해도 그 무심함과 잔인함에 마음을 베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함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의 존엄함이 아닐까. 그래서 2011년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면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너무 쉽게 대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구실로 누군가의 삶은 마땅히 희생되어도 좋을 것으로 여긴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지역이기주의라는 비난으로, 보상금을 더 받으려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려 모욕당한다. 누군가는 이 사회가 말하는 ‘대의’와 ‘모두’에서 제외되고 생략된다. 그 사람들보다는 국가발전과 개발의 지표가 더 중요하기에 우리는 무심하게 알아도 모르는 척, 혹은 정말 모른 채 살아간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사람됨을, 타인을 보살피는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땅은 보상근거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향수와 추억, 찬란한 생의 기쁨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터전

 

『밀양을 살다』는 그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해 12월 기록노동자, 작가, 인권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기록자들이 밀양 주민들이 살아온 궤적을 옮겨 담았다.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송전탑 건설로 인한 피해자이거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로만 전달될 뿐이다. 쉽게 간과되고 잊혀지는 뭇사람들의 삶을 들으면서 송전탑 반대 싸움의 의미는 무엇인지 헤아리면서 우리는 잃어버린 감각을 일깨우고 동료 인간으로서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웃으로 끈끈한 정을 짓는다. 서로의 어려운 사정을 공통분모로 니캉 내캉 언니, 동생이 되고, 신산한 삶의 울타리가 되어 울력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밀양은 조상의 기운이, 어린 시절의 향수와 추억이, 찬란한 생의 기쁨과 눈물이 밴 삶의 터전이다. 가진 것 없이 몸뚱이 하나로 일궈온 고단함과 대견함의 역사이고 이제는 나와 자식들을 먹이고 쉬게 할 휴식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밀양은 마을이면서 동시에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다. 765kV 송전탑은 바로 이 위에 서고 있는 것이다.

 

밀양이 밀양에게

 

내가 만난 사람은 상동 여수마을의 성은희 님이다. 그이를 만나러 가는 길, 겨울이 지나는 황톳빛 들녘 곳곳에 형광띠를 두룬 경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을 길목마다 배치되어 있어요. (…) 우리 집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데 차가 올라오면 쫓아와서 검문을 해요. 아주 살 수가 없어요.” 살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신고할 데가 경찰인 줄 알았는데 그 경찰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성은희 님은 굴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다시 경찰에 신고하기도 하고 시청에 연락을 하기도 한다. 모두 내 일이 아닌 듯 어물쩡 넘어갈 때 이게 정말 내 나라 맞는지 정부에 대한 배신감에 울화통을 터트리며 한편 씩씩하게 답답한 현실을 헤쳐나갔다.

성은희 님은 밀양으로 이사 온 지 15년째다. 처음에는 주민들과 섞이는 것이 서먹했지만 동네 비닐하우스 일을 거들어 다니면서 낯을 익히고 친분을 쌓으면서 ‘동네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너댓 굴통(비닐하우스를 세는 단위)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농사를 짓고 집 인근에 감나무를 키우며 어엿한 농사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송전탑 문제가 터지고는 ‘765가 본업이고 농사는 부업’이 되어버렸다. “처음 철탑부지로 선정됐다고 했을 때는 그냥 전봇대 하나 꽂히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2005년도에 우리도 설명회한다고 해서 다녀왔지만 뭔지도 모르고 갔는데 그게 설명회래.” 처음부터 송전탑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제공은 없었다. 동원되다시피 공청회를 다녀오고 2년쯤 후 송전탑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면서 전봇대가 아니라 100m 높이의 철탑이 세워진다는 사실과 그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송전탑 건설반대는 우리 마을의 피해를 넘어 우리 모두의 안전한 삶을 위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우리사회도 핵발전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고 에너지 정책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러나 정부나 언론은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정부정책을 반대하는 걸림돌로, 블랙아웃으로 국가경제의 위험과 국민의 불편을 초래할 문젯거리로 취급했다. 혹은 자신들도 전기를 쓰면서 송전탑은 반대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민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돈을 얼마 주겠다. 아들 좋은데 취직시켜 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하고 2013년 12월 30일까지 합의를 안하면 보상금이 국고로 넘어간다면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불안한 마음은 의심이 되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가장 걱정이고 힘들다고 한다.

“철탑을 막고 못 막고를 떠나서 서로서로가 이래 할퀴고 니 탓인양 원망하면 서로의 의지를 꺾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끼리 믿어줘야 하는데. (…) 나중에 이게 끝나고 나면, 합의를 보든 어떻게든 끝이 날거란 말입니더. 그랬을 때 철탑 막아내지도 못하고 주민들 사이만 나빠진 것처럼 돼버리면, 그런 게 겁나요. 철탑을 같이 막고, 못 막더라도 다음에 만났을 때 반가워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그 때 열심히 싸웠는데, 죽을 똥 살 똥 싸웠는데, 그쟈? 이러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데….”

 

이 싸움의 끝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더 무엇을 앗아갈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을 끈을 놓은 것은 아니다. 아니 놓을 수가 없다. 지금 부여잡고 있는 희망 그 자체가 삶이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만들어가는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밀양을 살다』는 이제 자본과 개발에 대항하는 대표명사로서의 밀양이 또 다른 밀양에게 전하는 아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