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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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 강은주(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 승인 2018.04.1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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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망설임, 생생하게 새로 솟는 눈물, 생의 마지막 무렵에도 잘 떨쳐지지 않는 두려움과 원통함. 4·3 생존자 분들을 뵈면서 헤아려본 70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읽혀졌습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이 곳 제주에서 77개월 동안 일어났던 그 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제주 4·3’입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70

제주4·37년이 넘는 긴 시간 안에서 무장봉기, 민중항쟁, 학살 등 여러 성격의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건을 한 가지만으로 명명하지 못했습니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의 의견 차이를 넘어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당사자 세대 이후 몇 세대가 더 지난 다음에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70주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바른 이름을 붙이는 정명작업을 더 이상 후대로 그 책임과 부담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10분의 13만여 명이 학살되는 비극의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사건이 발발된 성격과 그리고 7년 가량의 긴 시간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민중항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 붙이지 못한 세월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났고 복합적인 사건들이 얽힌 제주4·3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 계기가 된 사건들 외에도, 제주의 역사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상황을 함께 봐야합니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 전체를 군사요새화 시키려고 했던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기지를 만들고 수탈당했던 많은 제주사람들은 제주도-오사카 항로가 열린 이후 일자리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다가 해방 후 6만여 명의 제주사람들이 고향땅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토록 꿈꿨던 해방된 조국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미군정은 친일인사들을 재등용했고, 제주사람들이 일본에서 고생해서 모은 재산을 거의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주사람들은 미군정이 파견한 육지 경찰과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꿈꿔왔던 해방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제주사람들은 곳곳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특히 제주도 각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주축으로 굳건한 주민자치를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731, 3·1절 기념대회 중 기마경찰이 탄 말에 아이가 채여 다치게 하는 일이 발생했고, 사람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며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합동 총파업이 이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지사와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육지의 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습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습니다. 서북청년단은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경찰이 구금자들을 고문하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19483월에는 경찰서에서 고문치사 사건이 세 건이나 발생하게 되고 제주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194843일 새벽, 한라산 중산간의 오름마다 봉기를 알리는 봉화가 타오르면서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정은 더 많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제주로 보내 무장봉기를 막으려 했으나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미군정과 이승만정부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 선거를 추진합니다. 5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지만 제주민중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를 위해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투표가 무효 처리되면서, 미군정은 제주에 더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481017,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이 포고령은 마을을 비우라는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소개령은 사실 초토화작전에 가까웠습니다. 토벌대는 11월 중순부터 1949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중산간 지대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내려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를 들며 학살했습니다. 이로 인해 토벌대를 피해 입산하는 피란민이 오히려 더 늘었고, 피란 다니다 잡히면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없이 사살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성폭력까지 가해지면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19493월부터 토벌대는 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을 병행했습니다.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 중 귀순하는 사람은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고 이 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49510일에는 재선거가 치러지고, 이 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됩니다. 그러나 토벌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506·25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 가입자, 입산자 가족 등을 끌고가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집단학살을 저지릅니다.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대다수가 사살되었습니다. 1954921, 한라산 금족(禁足)령이 해제되면서 제주 4·3사건은 77개월 만에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70년을 맞은 지금도 이 사건이 끝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 외쳤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 반대”, “온전한 통일독립”, “공권력의 탄압 중단과 같은 구호들은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이고 지금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70년 전에 끝난 제주만의 역사가 아닌

지금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제주4·3

과도한 국방비 지출과 같은 분단비용 부담, 온전하지 못한 사상의 자유는 실제로 현재 우리 삶의 질을 저해하는데도 만성화 돼서 잘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또 국가폭력이 일어나는 국책사업의 현장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4·3과 같은 참극이 벌어지고있는 시리아, 버마의 로힝쟈 학살 등에 눈감는 것은 곧 4·3을 잊는 것과도 같습니다.

 

4·3 70주년을 앞둔 지금은 마침 남북 정상회담을 이야기하고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반분단운동이기도 했던 제주4·3은 재조명되고 제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70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큰 의미 중 하나는, 10년을 단위로 한 주기 중에서는 4·3의 생존자 분들이 맞이하는 사실상 마지막 주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70년인 지금도 늦었지만, 뒤늦게라도 미국정부는 4·3에 대해서 사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4·3특별법 역시 더 늦기 전에 개정되어서 생존자 분들에 대한 개별 배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생각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온 생존자 분들께서 7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도록 제주4·3에 많은 관심 갖고 함께 행동해주시기를 청합니다.

 

* 이 글은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월간 소식지에도 실렸습니다.

 

[서명] 제주 4·3, 미국 책임 규명 10만인 서명 운동

http://bit.ly/2zPUECp

[가입]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이 되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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