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사건 유죄판결은 냉전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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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 사건 유죄판결은 냉전의 잔재"
  • 안주리
  • 승인 2002.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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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ㆍ시민단체 항소심 공동대책위 결성키로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작문논란에 대한 법원의 1심 유죄판결에 대해 언론시민단체가 "잘못된 결정"이라며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론표현의 자유와 사법부 개혁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와 미디어오늘은 18일 '이승복 오보관련 1심 판결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긴급 토론회'를 주최하고 서울지법의 1심 판결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주언 전 언개연 사무총장과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장의 항소심 과정에서 범국민운동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승복 사건 피고측 변호를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는 토론회 발제를 통해 법원 유죄판결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언론의 자유는 국가권력, 즉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와 스스로 권력으로 자리잡은 언론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며 "다양한 견해와 사실의 자유시장을 통한 경쟁과 검증을 토대로 한 민주정치 최대의 적이 언론으로 대두된 상황에서 어떻게 국민의 알 권리를 확보할 것이냐가 과제"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승복 사건의 명예훼손 소송 쟁점은 과연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는지와 이를 단독보도한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현장 취재를 통한 결과물인지 여부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시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신화로 인식되고 있는 발언 여부보다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접목된 조선일보 기사가 취재의 결과물인지를 따져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김형태 변호사 "조선일보 기사가 작문임을 입증하는 정황증거 충분하다"

김 변호사는 이승복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보도가 오보임을 입증할 수 있는 정황으로 첫째 조선일보 취재기자가 학살현장에서 군경에 취조를 당했다고 상세한 정황설명을 했는데 나중에 군경이라고 지목한 사람은 당시 경향신문 현장 취재기자로 드러났으며 경향신문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둘째는 조선일보는 살해장소가 마당이라고 했는데 실제 장소는 안방이었으며 다른 신문들은 모두 안방으로 보도했다. 셋째 조선일보 기자는 이승복의 군의 공산당 관련발언을 형인 이학관씨를 통해 들었다고 기사에 썼는데 당시 이학관씨는 심한 중상으로 사건 이후 두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넷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향신문과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기자, 마을 사진관 기사 등 증인들이 아무도 조선일보 기자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복 군 집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라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갔었다면 이들이 보지 못할 수가 없다. 다섯째 조선일보 기자는 기사송고를 한참 떨어진 목장에서 했다고 말했는데 당시 현장에서 20분 거리에 우체국이 있었다는 점 등이다.

"조선일보 제출 사진 조선일보 기자가 찍었다는 증거 없어"

김 변호사는 재판부가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로 채택한 조선일보 사진의 경우 경향신문 기자가 찍은 사진과 등장인물이 거의 동일하고 각도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제3자가 찍은 것으로 보이나 이를 조선일보 기자가 찍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즉 조선일보가 당시 현장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진을 찍은사람이 조선일보 기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이같은 정황을 볼 때 피고들의 조선일보 기사가 오보라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고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이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형사처벌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세계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남미 동구 아프리카에 불과하며 미국 영국 독일 등 구미국가들은 민사로 해결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추세는 민사로 해결하자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에 대한 입증책임도 우리나라는 보도한 자가 지도록 하고 있으나 미국은 공적 인물, 공적 관심사의 경우 피고의 악의(actual malice)에 대해 원고가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입증책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이다.

김 변호사는 입증책임의 전환과 관련해 2002년 1월 22일자 대법원 판결문을 예로 들었다. "공적 존재에 대한 공적 관심사안과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간에는 심사기준에 차이를 두어야 하며 당해 표현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보다 명예의 보호라는 인격권이 우선할 수 있으나 공공적ㆍ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그 평가를 달리하여야 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안이 완화되어야 한다."(대법원 선고 2000다37524 판결)

"이승복 사건은 냉전 잔재 청산위한 공익적 의미"

김 변호사는 또 재판부가 유죄판결에 대해 "진실여부를 떠나 공적 관심사에 대한 공적 보도이고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인데 실형을 선고한 것은 지나쳤다"며 이 사건은 "신화로 남아 있는 냉전진영의 잔영을 깨고 작문이라는 유물청산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공익적인 목적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결론으로 "개별사건의 유무죄를 넘어서서 특정 세계관, 특정 이해만을 강요하는 언론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안상운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공적 관심사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과 관련된 대법원 판례를 무시한 것"이라며 "사법부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상' 시장에서 더 많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사상시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상운 변호사 "부르조아적 사법부가 냉전 잔영 깨기 어려웠을 것"

안 변호사는 "지금의 부르조아적인 사법부에 냉전의 잔영을 깬다는 것이 큰 부담을 줬을 것"이라며 "설사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정황증거만을 갖고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입증이 됐다"고 강조했다.

엄민형 전국언론노조 민실위 부위원장은 ""이번 사건을 통해 법원개혁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며 "이승복 오보는 60-70년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대표하던 조선일보의 수많은 사례중 하나일 뿐이다. 이번 판결로 역사적 죄악이 덮어질 순 없다"고 말했다.

엄 부위원장은 "이승복 사건과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해 숨진 두 여중생 사건을 비교해보면 조선일보의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두 사건의 죽음과 연결돼 있는 배경과 구조적 문제를 통해 이번 사건을 봐야 하는데 법원이 주관적 판단에 의해 왜곡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본다. 언개연이 구성하는 이승복 사건 공동대책위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복 사건과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의 이중성이 문제"

정지환 전 말지 기자는 98년 자신의 현장취재 경험을 설명하며 "조선일보 기자와 이승복 군의 형 이학관씨 등 조선일보 보도를 부인할 수 없는 이해당사자보다 사건 이후 드러난 사실들을 통해 이 사건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기자는 "98년 이승복 논쟁이 다시 불거지기 전, 이학관씨를 취재했던 한 기자(전 일요신문ㆍ신동아 기자)가 이씨로부터 이승복 사건에 대해 '솔직히 기억도 안 난다. 내가 알게 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언론과 법이 바로 서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동황 광운대 교수는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 맞붙었을 때 법원은 언론의 감시기능을 고려해 언론에 우호적인 판단을 많이 내린다. 그렇다면 개인과 거대 언론권력간의 공익과 관련된 소송시 언론에 대한 감시기능을 고려해 언론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한 개인에게 우호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주 교수는 "법원이 언론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한 개인을 형사처벌로 인신구속까지 시킨다면 감히 누가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김종배 전 편집장 "연장전까지 가 골든골을 넣겠다"

이승복 사건의 당사자인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장은 "조선일보가 소송을 제기하며 처음에는 법정 갈 필요가 있느냐, 좋게 풀어보자고 제안했었는데 거부했었다. 당연히 이길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졌다"며 법원의 유죄판결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 전 편집장은 그러나 "재판에 지고 나서 월드컵 이탈리아 전이 생각났다. 한국팀이 전반전에 1대0으로 지다가 후반에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 골든골을 넣어 승리하지 않았는가. 이제 전반전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연장전까지 가 골든골을 넣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번 사건은 이념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 본연의 문제인 팩트, 즉 ABC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재판과정에서 밝히지 않은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는데 일체 공개를 안 했었다. 이제 이 사건은 국민법정으로 갈 정도로 확대됐다. 앞으로는 언론을 통해 모든 자료를 공개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사회를 맡은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은 "지난 95년 이후 시민사회운동에서 사법부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사라졌다. 앞으로 다시 사법부 개혁운동을 펼쳐나가도록 하자"며 "정지환 전 기자가 홍세화씨의 '나를 고발하라' 운동을 통해 조선일보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겼듯이 이제는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승복 사건에 접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속보, 사회, 사설/칼럼] 2002년 09월 19일 (목) 10:02

프레시안 이영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