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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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 남상덕
  • 승인 2002.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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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1. 순교하면서 얻은 구원, 배교하면서 지킨 신앙
프랑스 빠리의 외방 선교회 본부, 그 곳의 작은 유물 전시관에는 다 닳은 성모상이 새겨진 작은 성화판(聖畵板)이 하나 전시되어있다. 바로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침묵’에서 페레이라 신부가 밟고 지나간 그런 성화판이다. 닳고 닳은 그 성화판. 자신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왔던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왔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 가득찬 바로 그 성화판을 밟는 페레이라 신부에게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순교한 이들이 가슴에 십자가를 품고 구원을 얻고자 했다면 페레이라 신부는 십자가를 밟는 배교의 아픔으로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다. 순교한 분들이나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의 공통점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버림으로써 신앙과 구원을 얻었다는 것.

2. 짓밟히는 성전, 울부짖는 신자
"나는 지금 기자로서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 묻고 싶습니다. 병원 성당으로 경찰들이 투입된 점에 대해 사제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절규를 한다. 9월 11일 강남 성모병원에 파업을 해산시키겠다며 경찰들이 들어왔다. 경찰들은 성당 제단 위에까지 난입하여 십자가를 부여잡고 저항하던 노조원들을 끌고 나갔다. 그 장면을 취재하던 기자가 신부에게 달려가 울며 묻는다 "나는 지금 기자로서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 묻고 싶습니다. 병원 성당으로 경찰들이 투입된 점에 대해 사제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3. 이권 때문에 버린 신앙, 체면 때문에 포기한 십자가
그 동안 100일이 넘도록 끌어온 교회 병원에서의 파업사태를 보며 교회의 많은 이들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위헌적인 법률로 여겨지는 직권중재를 핑계삼아 파업 자체를 불법으로 여기는 병원 측의 뜻에 동의한 때문도 아니고 이미 예전의 노동운동과는 다르다는 ‘대규모 사업장’의 파업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의혹을 갖고 있어서 침묵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교회가 운영 주체로 있는 병원이기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해결을 기대했고, 그도 저도 아니라면 설사 뱀 같은 슬기로 ‘조삼모사’의 세속적인 타결책을 제시한다 해도 최소한 대규모 병원의 운영 주체라면 그 정도의 해결능력은 가지고 있으리라 한편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나타난 결과는 무엇인가? 교회 정신은 철저히 짓밟히고 기본적인 경영과 노사관리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아니 그런 기대는 고사하고 무지막지한 경찰에 성당과 십자가까지 짓밟으라 내어주며 권력에 기대어 문제를 강제로 꿰매어 버렸다.

4. 당신들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분노하는 심정으로 서울 대교구의 정진석 주교와 가톨릭중앙의료원장 신부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성당에 경찰들을 난입시켰는가?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십자가를 쥐고 있는 손들을 떼어내었는가? 당신들의 돈으로 지었으니 그 성당이 당신들의 것인가? 당신들이 돈으로 사서 걸었으니 그 십자가가 당신들의 것인가? 누구도 그럴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성당에 경찰이 들어오라고 ‘허락’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그 누구도 십자가를 잡고 있는 손을 뜯어내어 잡아가라고 서명할 수 있는 손은 없다. 병원의 불법 파업한 노동자가 아니라 손에 피를 묻힌 이가 찾아 들어와도 성당 안으로 경찰을 불러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들의 성당이 어떻게 지켜져 온 성당인가? 어떤 이들은 차라리 목을 내어놓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가슴을 찢는 배교까지 하면서 지켜온 성당이며 십자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그곳을 더럽히라고 내어 주는가? 십자가를 쥐고 있는 손들을 떼어 내는가?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인가? 당신들은 누구인가?

5.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렇게 성당 제단까지 경찰을 불러들여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강제로 손을 떼어놓으며 얻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가? ‘사회의 정의’? ‘법’?, ‘가톨릭 이념’? 그래, 그렇게 해서 지켜졌는가? 차라리 지키려 했던 것은 교구와 병원의 이익, 주교와 사제의 체면, 그리고 그 안에 가득찬 세속적인 욕심이 아니었던가? 단지 이것은 파업의 해산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가 아니다. 나중에 나올 뻔한 대답, 경찰의 무리한 진압 때문에 벌어진 실수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 그리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교회의 자리, 특별히 서울대교구가 서있는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신앙을 지키기보다는 이권을 지키려 하고, 구원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권력을 얻으려는 교회의 비뚤어진 자리매김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6.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버리자.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새로 시작하자. 애시당초 우리의 시작이 예수님의 첫 사랑이 거대한 병원 사업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애시당초 우리의 시작이 예수님의 첫 가르침이 수천 억대의 자본을 가진 대학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애시당초 우리의 시작이 예수님의 첫 능력이 힘센 권력과 자본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지금 그것에 짓눌려 우리들의 신앙이 고통스럽고 그것에 짓눌려 우리들의 구원이 위태롭지 않은가?

돌아가자, 버리자, 새로 시작하자. 거대한 학교, 거대한 병원, 거대한 사업, 그리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세속적 이권 다툼과 알력, 자리 싸움. 심지어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양심을 버리고 신앙을 포기하고 구원은 멀리 사라지는 그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돌아가자, 버리자, 새로 시작하자.
우리들은 아름다운 첫 마음을 아직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먼 산 위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를 그리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은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진리를 순교자들로부터 생생히 보고 듣지 않는가? 우리들은 '희망'이란 바로 돌아가,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인들이 아닌가?

7.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구원
순교한 우리들의 신앙 선조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는 신자들을 사랑하려 자신을 버리는데 우리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이권을 사랑하려 신자를 십자가를 버리지 않는가?

우리들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빛두레 제583호:쉐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