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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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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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2월호 김형태 변호사
개미와 함께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2000년 2월호 김형태(변호사)

엊그제 재판을 하러 법정에 갔습니다. 고생 보따리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앉아있는데 갑자기 가방에서 눈에 띌락말락 작은 불개미 몇 마리가 줄을 지어 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옆자리 변호사들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행여 자기 잇속이 달아날까, 제 권리를 빼앗길까 오만상을 찌푸리고 앉아들 있는 뒷자리 방청석이나,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판사, 변호사들 사이에 난데없이 웬 불개미들의 행진? 나는 누가 그 개미들을 볼까봐 그리고 그 개미들이 바로 내 가방에서 기어나온 것임을 눈치챌까봐 부끄러운 마음으로 시치미를 떼고 앉아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있으면 그 작은 녀석들이 팔도 물어뜯고 내의 속으로 들어와 등도 물어뜯습니다. 작은 미물이지만 내가 미운지 한번 물어뜯으면 그 통증은 짜릿하게 온몸으로 퍼져갑니다. 독감이 걸려 일주일을 자리에 누워있으면서도 ꡐ그래 내가 인생을 탕진하다 이 꼴이지.ꡑ 하면서 약도 안 먹고 버티는 나이지만 그 개미가 무는 데는 ꡐ아야아!ꡑ 하고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방에는 불개미들이 줄을 지어 책장 밑으로 벽 아래로 문지방으로 기어다닙니다. 지은 지 오래된 집이라 나무 기둥이며 벽들 속에 개미집이 있는 탓입니다. 몇 년 전까지는 모조리 쓸어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같이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침에 비를 들고 먼지를 한데 쓸어 모으면 그 조그만 불개미들이 먼지며 머리칼들 사이에서 수십 마리가 오글거립니다. 일단 그 녀석들이 흩어져 도망갈 시간을 주고는 먼지들만 골라 손으로 집어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아침마다 드리는 나의 기도입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나 혼자만, 인간들만 이 땅에 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니 같이 살게 하소서.
김용택 시인의 이런 시도 있습니다.
ꡒ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 사과는 그 벌레의 밥이요 집이요 옷이요 나라였습니다. /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 누가 사과가 사람들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 / 사과는 서러웠습니다. / 서러운 사과를 사람들만 좋아라 먹습니다.ꡓ
정호승 시인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ꡒ겨울밤 창밖에 눈은 내리는데 / 삶은 밤 속에 밤벌레 한 마리 죽어있었다. / 죽은 태아처럼 슬프게 알몸을 구부리고 밤벌레는 아무 말이 없었다. / 그날부터 나는 삶은 밤은 먹지 않았다. / 누가 이 지구를 밤처럼 삶아 먹는다면 내가 한 마리 밤벌레처럼 죽을 것 같아서 등잔불을 올리고 밤새도록 밤에게 용서를 빌었다.ꡓ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귀를 물어뜯고 목도 물어뜯는 저 개미는 당장 눈에 보이는 생명체이니 차마 죽이고 내쫓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죽이고 내쫓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생명들, 무생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출근길에 사무실이 있는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멀쩡한 두 다리로 잠깐 걸어 올라가면 운동도 되고 전기도 그만큼 절약될 테고 그 전기로 추위에 떠는 누군가를 따스하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어려운 이웃을 추위에 떨게 하며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다시 운동 부족이라고 주말이면 산을 오릅니다. 산에 오르면서 내 발에 밟혀 죽는 미물들이며 패여나가는 흙이며 그래서 앙상하게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며.
환경운동이란 말 자체가 이미 교만한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인간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분별심을 지니고 있는 한 자연은 조만간 인간에게 보복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의 종류는 하루에 무려 100여 종이요, 내 입맛에 맞는 소고기를 먹으려면 그 몇 배 되는 곡식을 먹여야 한다니, 내가 소고기를 덜 먹으면 소 먹일 곡식으로 몇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답니다.
지난 20세기 그리고 지난 천년대는 온 인류가 ꡐ나ꡑ를 중심으로 살아온 시대였습니다. ꡐ나ꡑ를 마음껏 즐기려고 돈을 모으다가 결국에는 돈이 주인이 되는 자본주의가 이 시대를 온통 휘젓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ꡒ물건을 사라. 이 물건이 너의 안락을, 편리를 보장해 주리라.ꡓ고 악마의 교설을 늘어놓습니다.
내가, 내 이웃이, 우리 아이들이 온통 ꡐ자신ꡑ의 편리와 안락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너와 이웃과 삼라만상은 그저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는 그렇게 될 거라고 이미 묵시록에 써놓았습니다. ꡒ네 상인들이 땅의 권력자가 되었고 만국 백성이 네 마술에 속아 넘어갔다.ꡓ
눈만 뜨면 텔레비전이고 신문이고 온통 돈 이야기뿐입니다. ꡒ어느 여직원이 인터넷 정보주로 10억을 벌었대.ꡓ ꡒ코스닥 시장이 미국 나스닥의 영향으로 25% 떨어졌대.ꡓ 가만히 앉아서 10억을 벌고 가만히 앉아서 몇 천만 원을 날리는 이 악마의 시대를 슬퍼하는 이들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영악한 이들은 이 시류에 몸을 맡겨 일확천금을 노리고, 그렇지 않은 평범한 이들조차 ꡐ나만 바보되는 것 아닌가.ꡑ 하는 피해의식에 겁을 내고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는 100여 년 전에 이미 돈이 주인이 되고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한탄하며 ꡐ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ꡑ고 외쳤습니다. 그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돈과 그 돈을 가진 이들에 대한 증오를 돈과의 싸움의 무기로 쓰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돈과의 싸움에 나서야 할 이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입니다. 주일마다 성당 가서 헌금 내고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복 받고 돌아오는 한가로운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 땅의 권력자인 돈과의 성전을 선포하고 그 싸움에 이 한 몸 바칠 전쟁의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총도 아니고 원자폭탄도 아니고 인터넷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용감무쌍한 영웅 지휘자도 필요없습니다. 어느 시골에 있는 풀무학교의 생각처럼 ꡐ더불어 사는 평민ꡑ들로 충분합니다. 덜 쓰고 덜 생산하고 덜 잘난 체하고 가족과 이웃과 생물, 무생물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길만이 이 자본주의를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일만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ꡐ하느님, 성인, 기도ꡑ 같은 종교적인 말뿐 아니라 내 직업을 통해서, 일을 통해서 싸우고 기도해야 할 묵시록의 마지막 때입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님은 이 싸움, 이 기도의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ꡒ지금 베틀에 앉아 베 짜고 있는 네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다.ꡓ
내 아들이, 내 친구가, 내 부하 직원이, 내 원수가, 내 방의 불개미가 바로 내 아버지 하느님이라 여기고 대하면 자연히 저 악마 자본주의는 물러가고 더불어 사는 평범한 이들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인권위칼럼>

<바로잡습니다> 지난 호에 「중용」을 인용한 문장에서 편집 실수로 ꡐ솔성지위도ꡑ를 ꡐ율성지위도ꡑ로 잘못 표기하였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