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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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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4월호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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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4월호 김형태(변호사)


지난 겨울 합천 해인사를 갔더랬습니다. 가야산 계곡은 깊고도 길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던 개천은 얼음과 눈으로 덮였고 산에도 나뭇가지며 바위들이 온통 흰눈을 가득 이고 있었습니다. 스님들은 산문을 긴 나무막대기로 닫아 걸고 동안거에 들어가 그분네들 하얀 고무신만 댓돌 위에 가지런했습니다. 똑같이 한 세상에 나서 나는 속진(俗塵)을 헤매는데 저분들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이 산과 개울과 나무, 눈 속에서 도를 닦고 계시는고. 부러움이 마음 가득 일었습니다. 하긴 저 절집도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서로 다른 성격에서 오는 괴로움이며 저 혼자 옳다 생각하는 독선이며 게으름이며 시기가 없을 리 없겠지요. 일찍이 혜능 스님도 저 청정하게 보이는 산문을 필사적으로 도망하신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혜능은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산골 나무꾼이었습니다. 홀어머니 봉양하느라 나뭇짐 지고 주막에 들렀다가 한 길손의 경 읽는 소리를 문밖에서 들었습니다. ꡒ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ꡓ 마땅히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는 바 없이 심지어는 내가 깨달았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참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나무꾼 혜능은 마음이 열렸습니다.

도미니코 수도회 원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소녀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찾아와서는 ꡒ나는 소녀도 부인도 남편도 아내도 과부도 처녀도 주인도 하녀도 머슴도 아닙니다.ꡓ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 소녀는 이리 대답합니다. ꡒ만일 내가 소녀라면 최초의 순진무구함 그대로 간직해야 하고 내가 부인이라면 영원한 말씀을 계속 잉태해야 하고, 남편이라면 모든 악에 맞서 싸워야 하고 아내라면 남편에 신실해야 하고, 과부라면 사랑을 찾아 다녀야 하고 처녀라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독실해야 하고, 하녀라면 겸손 속에서 내 자신을 하느님이나 모든 피조물보다 낮은 존재로 여겨야 하고 머슴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아니고 나는 다만 ꡐ어떤 것들 가운데 어떤 것(Something among somethings)ꡑ일 뿐입니다.ꡓ 금강경의 ꡐ응무소주이생기심ꡑ과 같은 대목입니다.
나를, 깨달은 자 또는 아직 미혹한 자로, 변호사와 피고인으로, 목자인 성직자와 그 보살핌을 받는 평신자로 분별하고 그 특정한 상(相)에 집착하면 아버지께서 딱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글자도 모르는 무식쟁이 혜능은 절집 부엌에서 불이나 때던 불목하니였지만 어디에도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 줄 알아 달마에서 내려온 법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미 계를 받고 그 법통을 받고자 도를 닦던 스님들은 그를 죽이려 몇십 년을 쫓아다녔습니다.
겨울 가야산 자락에서 분별심의 또 다른 한 자락을 보았습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성철 스님 사리탑이 마치 70년대 개발독재 시절 무슨 고속도로 개통 기념탑처럼 으리번쩍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분을 뵈오려면 불전에서 천 배, 천 번 절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만큼 도가 높은 분이니 만나뵈오려면 그 정도 정성은 들여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닐 터입니다. 천 번 온몸과 머리를 부처님 앞에 조아리는 동안 그 절하는 이의 마음속에 있던 아집, 교만, 분별심을 다 털어버리라는 하나의 가르침과 방편으로 그렇게 하셨을 겝니다. 그리 한 천 번쯤 ꡐ자기ꡑ를 낮추고, 버리고 나면 사실 굳이 성철 스님을 안 뵈어도 뵈온 것이나 다를 바 없겠지요. 아집스런 마음 가지고 그분을 천 번 친견한들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어쩌자고 사람들은 ꡐ성철ꡑ이라는 그분의 이름과, 살이며 정(精)이며 뼈 조각에 불과한 사리를 저리도 야단법석 떠받드는 것인지요. 천 배를 마쳐 ꡐ나ꡑ를 철저히 버린 이가 절하는 대상은 ꡐ성철ꡑ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고 그 몸 속에 훌륭한 사리를 지닌 그 어떤 개인이 아니요 너와 나 그 누구나의 안에 계신 ꡐ참 나ꡑ이신 아버지가 아닙니까.
엊그제 엘살바도르의 가난하고 희망 없는 민중들과 함께하다 총에 맞아 돌아가신 로메로 주교님의 시복 요청이 있었습니다. 시성 시복보다 그분의 참뜻-아니 이때 참뜻이란 로메로 주교라는 한 개체의 뜻이 아니고 바로 아버지의 뜻이겠지요-그 참뜻이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 마음속에 함께 살아남아 있는 것이 더 뜻깊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세상에 칭송하고 찬양할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을 버리고 비워 아버지만 드러내신 예수님조차도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ꡒ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ꡓ(마르 10,18).

제 어머니가 어느 봉사단체 미사를 갔다 오셔서 혀를 차셨습니다. 평소 영성이 깊고 훌륭한 강론을 잘하시는 어느 신부님이 미사 도중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들을 지목하면서 반말로 심하게 꾸짖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아직 불혹의 40대 중반이었는데 어머니뻘 되는 7,80대의 할머니들을 꾸짖자 미사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졌더랍니다. ꡐ나는 지도자요 너희는 모자라는 양들이다ꡑ는 상(相)에 매이신 것은 아닌지.
스님, 목사, 변호사, 신부, 국회의원…. 모두 이 시대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잘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ꡒ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너희는 스승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ꡓ(마태 23,6-8 참조).
예수님 말씀대로 제대로 산다면 신부니 변호사니 죄인이니 하는 상(相)을 벗어 버릴테니 남들 눈에 저 사람 똑똑하다거나 좋은 일하고 있다거나 신앙심이 깊다는 평을 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 눈으로 볼 때 어찌 보면 바보스러워 보이는 어느 노(老) 신부님을 압니다.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는 몇십 년 전 노동현장에서 만나뵈었던 그분이야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따른 이라고 알아모시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 신부님처럼 남들로부터 똑똑하다거나 영성이 깊다거나 하는 칭찬을 받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바보처럼 살고 싶습니다. ꡐ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딸ꡑ이라는 전설 속의 그 소녀처럼, 소녀도 부인도 남편도 아내도 처녀도 주인도 하녀도 머슴도 아닌, 그저 여러 어떤 것들 가운데 어떤 것 하나일 뿐이고 싶습니다.

<인권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