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쟁이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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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 환자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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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5월호 김형태 변호사
예수쟁이 환자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5월호 김형태(변호사)

부끄러운 이름 예수님. 적어도 군대에서는 그렇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밥 먹으러 갈 때도 줄을 서야 하는 훈련병 시절은 정말 하루가 한 달 같습니다. 주일이면 훈련장교는 이렇게 말합니다.ꡒ환자들 나와.ꡓ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군대에서 그리들 부릅니다. 환자들이라니 무슨 환자? 예수님께서 이미ꡒ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ꡓ이라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일까.
어리석은 우리는 마치 우리를 통하여 스승님의 말씀이 실현된 양 기고만장하여 더욱 환자짓을 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이야 그 고난을, 제 교만함을 깨뜨리는 계기로 삼아 아버지께 순종하기라도 하겠지만, 종교 환자인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땅에 알려진 지 200년이 넘었고 6,70년대 개신교 신자들이 급증했고, 온 나라가 스승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뒤덮이고 수백억 원짜리 교회, 성당이 아름다운데 왜 저들은 우리를 환자라 부르는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전철을 타면 신자인 내가 보아도 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ꡒ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ꡓ협박을 하는 환자도 있고, 좀 점잖게ꡒ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ꡓ고 개신교 번역성서구절을 외는 이도 있습니다.
하긴 나도 고등학교 때 어느 선배를 따라 길거리에 그렇게 나선 일이 있습니다. 도대체 영원한 생명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묵상해 보고 아버지의 뜻을 살펴볼 형편도 못되던 그 어린 시절, 나는 그저 죽는 것이 두려워서 벌받는 것이 두려워서 내 한목숨 영원히 살아보려고 남산 도서관 앞에서 지나가는 이를 붙들고 정신없이 외쳐댔습니다. 정말 환자였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자는 우리 나라 인구의 과반수를 훨씬 넘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자들의 스승 예수님은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 때문에 슬퍼하시던 그 옛날, 당신의 제자들이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박해받은 이유는 산상설교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약육강식이 세상의 지배원리이던 로마제국 시절에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슬퍼하는 이가 행복하다 외치셨으니, 그분이야말로 환자 취급받으신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친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라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ꡒ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ꡓ고 써있는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급기야는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ꡓ(루가 9,23)니 이 무슨 정신병 환자의 소리인고. 나 잘되고 이 한목숨 아버지 품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보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인데ꡐ나ꡑ를 버리라니, 세상이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ꡐ환자ꡑ 예수를 그냥 살려둘 리 없음은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이제 2000년 뒤 이땅에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바로 그분 같은 이유로 환자소리를 듣고 있는가. 전혀 아닌 듯합니다. 이 세상이야 어찌되든, 수십만의 아이들이 날마다 점심을 굶든, 수백만의 북녘 사람들이 굶어죽든ꡒ나와 내 가족과 내 사업이 잘되게 해주십사, 내가 영원히 살게 해주십사.ꡓ고 눈에 불을 켜는 우리야말로 스승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살고 있으니 정말 환자라 불릴 만합니다.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저희들끼리만 몰려다니는 집단으로 비친지 오랩니다. 이런 인식은 이제는 하나의 확고한 사회적 평가로 굳어져 가는 듯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어느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그 자리를 내어놓고 시골에서 공동체를 꾸리며 농사짓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미국 인디언 호피족 이야기를 했습니다.
백인들이 호피족이 살던 땅을 차지하고는 이른바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기들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한번은 그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호피족 아이들은 다함께 모여서 서로 의논을 해가며 문제를 풀더라는 것입니다.ꡒ우리 선조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해결하라 가르쳐주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ꡓ수십 년 동안 수천 수만 번의 시험을 치르며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선 나에게 이 말은 커다란 충격이요, 아버지께서 주신ꡐ한 말씀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나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옆 친구한테도 내 노트를 보여주기 싫어했습니다. 내가 애써 정리해 둔 정보를 왜 너에게 주니? 남산 도서관 앞에서 몸과 입술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전교하러 다니면서, 학교 옆자리 친구에게는 노트도 안 보여 주던 나는 훈련소 장교 말마따나 종교 환자가 아닙니까. 이런 환자였던 내가 호피족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봉쇄 수도원에서 노동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라도 그 옷은 방직공이, 그 호미는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돋아나는 채소며 곡식은 햇빛과 공기, 물, 흙, 그리고 온갖 생물들이 제 몸 썩여 내어준 양분으로 큽니다.
다른 사람들과 천지만물 삼라만상과 함께 어울려서야 비로소 ꡐ내ꡑ가 사니,ꡐ나ꡑ밖의 다른 것 다 제치고 희생시키고, 나만 시험 잘 보고 잘먹고 잘살려 발버둥치는 이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스승 예수님도 나를ꡐ환자ꡑ라 부르실 겁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옳고 ꡐ내ꡑ가 죽어서도 영원히 살려는 생각을 버릴 때 세상은 더 이상 우리 신자들의 공동체를 환자집단으로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극심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고등학교 다니는 내 딸이 시험을 못 보면 친구에게 밀려 좋은 대학 못 가고, 좋은 직업 못 얻고 힘들게 살게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식과 논리를 벗어나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내 아이더러 ꡒ공부보다는 친구와 잘지내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ꡓ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왜 이처럼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원리로 굴러가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그게 아니라고 가르치셨고, 그 말씀대로 살고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리 살려고 애쓴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부끄러운 이름이 아닐 것입니다.

<인권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