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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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셈법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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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6월호 김형태 변호사
아버지의 셈법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6월호 김형태(변호사)

ꡒ자, 굵은 낙지가 왔습니다. 싱싱한 목포 낙지 굵은 낙지 한 마리에 천 원이요.ꡓ 고즈넉한 아침 골목길이 장사꾼의 마이크 소리로 갑자기 시끄럽습니다.
ꡒ약육강식의 아수라 세상 캄캄한 절망의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거듭거듭 아수라 세상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ꡓ 정호경 신부님의 우파니샤드 한 구절을 읽던 나의 평온도 깨어졌습니다.
약육강식의 아수라 세상이라. 그래 맞다. 저 목포 앞바다 갯벌 속에서 사람의 도움이라곤 눈꼽만큼도 받지 않고 아버지께서 주신 삶을 즐기던 저 낙지를 사람들은 무슨 권리로 잡아다가 한 마리 두 마리 세어가며 돈 천 원에 생명을 셈한다는 말인고. 나는 또 무슨 권리로 저 낙지를 종이 한 장 주고 사서 기름 찍어 입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인고. 정말 내가 바로 약육강식의 아수라로다.
저 트럭에 실린 어항은 그 속에 들어있는 낙지에게는 캄캄한 절망의 세상일 것이요 그러나 저 낙지에게도 하느님은 계시느니.
나는 아무 권리도 없이 저 낙지를 먹으면서 아이들과 처와 어머니에게는 이게 잘못되었고 저게 이렇다고 시비를 가리고 따져봅니다. 일터에 나가면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찾아와서는 눈물 흘려가며 저의 분노며 슬픔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법정은 날마다 수도 없이 무엇을 판단해 냅니다. ꡐ네가 잘했고 너는 죽어 마땅하고 이 땅은 네 것이고 너는 돈을 물어주어라.ꡑ 내가 보기에는 60점도 안되는 잘못된 판단도 수두룩합니다. 그 잘못된 셈법으로 애꿎은 이가 사형 당하고 집을 뺏기기도 합니다. 법관의 잘못만은 아니요 이 세상의 불완전성이 그 근본원인입니다.
칸트라는 이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우라고 감히 외쳤습니다. 법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했을 때, 유신독재라는 정치적 억압이 마치 저 낙지처럼 우리를 어항 속에 가두었을 때, 칸트의 이 말에 가슴 뛰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ꡐ무식한 자의 용감함ꡑ이라는 생각이 더 커졌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산수 시험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명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져야 할 진리(Truth)이지만 사실 하나 둘이라는 숫자의 세계에는 무너질 하늘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와 살을 지니고, 갯벌 속의 낙지를 돈주고 팔고 사고 먹는 이 세상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처럼 자명하고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수긍이 가는 ꡐ정의ꡑ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요.
청송에 가면 감호소가 있습니다. 그곳 수용자들은 자신의 죄에 부여된 형기를 다 마치고도 사회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길게는 7년씩이나 더 갇혀있습니다. 며칠을 굶다가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신 술기운에 경동시장 노점에서 운동화 한 켤레 훔쳤다가 징역 10월을 살고 다시 감호소에서 7년을 보낸 이도 있습니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전과자들을 격리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주장과 죗값을 다 치렀는데 왜 또다시 7년씩이나 가두어두느냐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합니다.
ꡒ죄지은 자 벌받고, 선한 자 상을 받는다.ꡓ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해 낸 최고의 ꡐ정의ꡑ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다 윤회니 심판이니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신 길도 따르지 않겠다며 용맹정진하는 제자의 자세를 본받아 인과응보에 관해서도 의심을 해봅니다. 저 소․돼지․닭은 무슨 죄가 있어 제 살림살이 방식을 빼앗긴 채 좁디좁은 우리에서 밤낮없이 억지로 먹고 키워지고 도살되는가.
나면서부터 Y염색체가 더 있는 사람들은 공격성을 타고나 남을 해칠 수밖에 없다는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전생에 악업을 지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긴 가섭존자의 제자 하나가 ꡒ도를 닦은 수행자는 인과의 법칙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ꡓ고 잘못 가르쳤다가 오백 세 동안 여우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아침 묵상을 하고 거룩한 이가 된 양 엄숙하고 근엄한 마음으로 나선 지 채 10분도 못되어 갑자기 앞에 끼어드는 차를 향해 욕을 하고 마는 내가 받을 인과응보는 무엇일까. 아버지, 기왕이면 저를, 저 감옥에 갇혀있는 살인범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만들어 주시지 그러셨어요.
당나라 법달 스님도 나처럼 그 스승 혜능께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ꡒ경에 이르기를 모든 대성문들과 보살들이 다 함께 생각을 다하여 헤아리더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는데 이제 범부가 다만 자기 마음만 깨달으면 곧 불지견(佛智見)을 이루는 것이라 하시니 스스로 상근기(上根機)가 아닌 자는 의심하거나 비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ꡓ
혜능은 그 투정을 이렇게 받으셨습니다. ꡒ부처님은 본래 범부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결코 부처님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스스로 백우거(白牛車)에 앉아있으면서 다시 문밖으로 삼거(三車)를 찾아 헤매는구나… 마땅히 알아라. 있는 바 모든 보물과 재물이 모두 네게 속하고 네 마음대로 쓰일 것이요 다시는 아버지니 아들이니 하는 생각도 할 것이 없으니.ꡓ
아니, 당나라 때 혜능 스님이 성서를 읽으셨는가! 번개같이 탕자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자기 재산 다 거두어 먼 고장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돼지우리에서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며 뒹굴던 아들을 맨발로 맞으시는 아버지. ꡒ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일한 저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더니 탕자 동생에게는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ꡓ 인과응보의 정의를 내세우며 억울해 하는 큰아들에게도 ꡒ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ꡓ고 하시는 아버지(루가 15,29-31 참조).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심이 아니요 상근기가 못되어 인과응보의 윤회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범부들을 위해 그리하셨듯이 스승 예수님의 복된 말씀도 프란치스코 성인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어리석음과 분노,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한 나와 청송 감호소 죄수에게 주신 말씀임을 내가 압니다. 집에서 아버지 말씀 잘 들은 큰아들에게는 염소 한 마리 안 잡아주었어도 재산 다 날리고 돌아온 탕자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셈법임을 압니다.
착한 이건 못된 이건 완전한 이건 모자라는 이건 다 당신의 아들로 맞아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셈법이니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는 인과응보의 윤회를 벗어납니다. 아버지는 약육강식의 아수라 세상, 캄캄한 절망의 세상 어디서나 계심을 우리가 알게 되었으니 비로소 우리는 아수라 세상을 벗어납니다.

<인권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