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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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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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7월호 김형태 변호사
그날이 오면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7월호 김형태(변호사)

ꡒ경상도 사투리를 서울 가서 우째 쓰겠습니꺼. 너무 부끄럽심더.ꡓ 지난 총선 끝나고 안동에 갔을 때 그곳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번 선거 때 경상도 지방의 지역감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호남 출신 대통령이 하는 일은 그저 밉기만 하고 아무리 괜찮은 정치인이라도 그 당에 몸담은 이상 떨어뜨리는 것이 당연하다.
개인이 개인을, 집단이 집단을 그렇게 미워하는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더랬습니다. 남과 북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미워하다가 수백만 명이 죽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기고, 수십만 명이 감옥살이를 하고, 50여 년 세월을 100만이 훨씬 넘는 양쪽 젊은이들이 항상 휴전선에서 서로의 심장을 겨누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서로를 미워하니 이 나라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참으로 슬프고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교인도 예외는 아니었고 차별을 말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외우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는가.
사회의 민주화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를 외치는 시민운동 단체들도 그렇습니다. 단체간의 경쟁이 지나쳐 제 조직의 존재와 발전만을 목표로 삼는 예가 흔합니다. 사람과 자연을 나누고 네 나라와 내 나라를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나누고 부자와 빈자를 나누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나누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고 네 단체와 내 단체를 나누고 너와 나를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눕니다.
하긴 존재 자체가 이미 너와 나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 존재하는 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를 고(苦)라 가르치셨습니다.
「비존재로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일본 사람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ꡒ우주에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목적은 그저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의 계속을 위해서 어쨌든 즐거움 정도는 줄 테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움직여라, 생각하라, 고뇌하고 기뻐하라, 사랑하고 슬퍼하라, 탐구하라. 힘써라 벌레 같은 원숭이들.ꡓ 존재 자체가 고통이란 말은 옳습니다. 사람들은 더 잘 존재하려고 하느님께 매달리고 해탈을 바랍니다. 급기야는 하느님, 해탈도 ꡐ존재ꡑ로 여기고 맙니다.
그러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참 적절히 표현하셨듯이 하느님은 돌, 강, 나무, 사람 같은 존재의 한 방식을 넘어서서 ꡐ없이 있으ꡑ십니다. 너와 나의 차별, 나눔이라는 존재양식을 넘어서신 분. 노자는 그것을 ꡐ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無名 天地之始)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有名 萬物之母)ꡑ라 일컬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존재라는 ꡐ나ꡑ를 넘어서서 내 이웃, 삼라만상 그리고 없이 있으신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차별, 분별, 나눔을 넘어서는 일, 다른 말로 ꡐ사랑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을 때 이미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서 아버지의 품안에서 하나 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를 보고 놀라 초막 셋을 지어 선생님과 모세, 엘리야에게 드리겠다고 외쳤습니다. 없이 있으신 이 경지를 두고 루가는 ꡐ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ꡑ 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선 경지를 버리고 다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존재의 고통 속에서 울고 웃는 어리석은 우리와 더불어 존재의 고통을 같이 맛보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어느 성인이 이 ꡐ존재ꡑ의 차원을 넘어섰다 해도 우리는 그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리 부러워해도 소용없으니 존재의 고통을 뛰어 넘을 이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승님께 찬탄과 예경을 바침은 그분이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 경지를 버리고 비참한 ꡐ존재ꡑ 곁으로, ꡐ존재ꡑ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존재의 한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긴 하지만 너도 없이 있으신 분의 자녀이니 그분의 완전하심을 본받아 그렇게 되려고 애써라.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전라도와 경상도, 남과 북, 너와 나, 네 단체와 내 단체, 네 나라 내 나라의 분별을 버리고 하나가 되어라.
나누고 분별함은 미움의 시작이요 하나가 됨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어서도 이 ꡐ존재ꡑ의 한계를 벗기가 어렵겠지만, 다른 말로 내 이웃과 삼라만상과 아버지를 제대로 사랑하기가 어렵겠지만 스승님께서 우리와 끝까지 함께 계시니 걸음마 배우는 아이처럼 어려운 걸음을 한 발짝씩 떼어놓을 수 있습니다.
달도 차면 기웁니다. 나눔, 분별, 미움이 극에 달했으니 이제 화해와 사랑의 길로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얼마 전 남북의 두 정상이 두 손을 부여잡고 포옹을 하고 뺨을 마주 댔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게 꿈은 아닌가 싶었을 겝니다.
그날 나는 택시 안에 있었습니다. 만세소리 천지를 울려 중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운전하던 분도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차를 어디 길 옆에 세우고 텔레비전이나 보자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55년 긴 세월 온 나라 사람들을 차별과 미움으로 몰아갔던 이 얼음의 체제가 녹아내리면 다들 제정신으로 돌아와 서로 화해하게 될 겁니다.

시인 심훈은 그날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ꡒ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ꡓ

예언자 에제키엘은 남과 북이 하나되는 그날이 오면 해골들이 일어나 춤추리라 예언했습니다.
ꡒ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를 유다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에 붙여 한 막대기로 만들리라. 둘이 하나가 되게 내가 잡고 있으리라ꡓ(에제 37,8-19 참조).

이제 미움을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버리고 경상도 전라도의 나눔을 버리고 사람과 자연의 차별을 버리고 너와 나의 분별을 버릴 그날이 왔습니다.

<인권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