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나의 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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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나의 흰 손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0.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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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8월호 김형태 변호사
부끄러운 나의 흰 손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8월호 김형태(변호사)

쑥갓이며 아욱에는 온통 꽃이 피었습니다. 총각무에도 심이 배겼습니다. 지난 5월 씨뿌린 뒤 주말마다 가서 비름도 뽑고 적당히 솎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확기 몇 주를 거푸 술추렴만 하다 돌아왔더니 별로 거둘 것이 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500평 남짓한 밭이지만 주말에 감당하기엔 너무 넓고 나오는 소출은 너무 많습니다. 손이 별로 가지 않아 게으른 농사꾼에게 알맞다는 콩으로 밭의 대부분을 덮어놓았습니다. 그러고도 남는 땅에 고추며 배추, 무 등을 심습니다. 그나마 동네 아저씨의 도움이 없으면 사실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더구나 이 500평 밭에서 나오는 농작물을 장에 내다 팔아보았자 매주 서울서 왕복하는 자동차 기름값도 안되니 이 어설픈 농사꾼 흉내는 흰 손 가진 도시 사람의 사치일 뿐입니다. 땅값을 은행에 넣는 것이 애써 농사짓는 것보다 수익이 높은 우리 현실이 참으로 암담합니다.
대학시절 노자 강의를 해주시던 함석헌 선생님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당신의 흰 손을 늘 부끄러워하셨습니다. 내 흰 손도 주말 한나절 호미질에 물집이 잡히고 삽질 몇 번이면 껍질이 벗겨집니다.
술이며 고기를 탐하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해마다 하는 1주일 단식을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내리는 결론은 ꡐ사람은 먹기 위해서 산다.ꡑ입니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만은 아닙니다. 땅의 정기와 하늘의 빛과 농사꾼의 땀이 어우러져 지어낸 쌀 한 톨 한 톨의 희생을 뜻하니 엄숙한 파스카 잔치에 비할 법합니다. 거기다가 밥이란 가족이며 친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것이니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존재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존재와 분리되는 슬픈 운명인 사람이, 살아서 특별히 더 이룰 무엇도 없으니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은 괜한 허풍입니다.
요즈음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음식이며 물건들에 대한 광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온통 핸드폰, 인터넷, 통신, 주식 광고뿐이니 저 가상공간이며 정보를 우리가 먹고 살 수나 있는 것인지.
광고란 본디 돈 되는 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우리의 기본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ꡐ일ꡑ이 저리도 푸대접받는 것은 곧 땀흘려 일하는 농부며 노동자들이 푸대접받는 것입니다. 그나마 종이 위의 글자 같은 구체적 현실도 아니고 컴퓨터 모니터 속의 가상공간을 근거로 몇 달 사이에 몇 억 몇 십억을 벌었다는 벤처 기업 사장들의 흰 손을 보면 이 자본주의 문명의 끝을 감히 예언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부끄러운 건 내 흰 손, 인터넷 벤처 기업 사장의 흰 손뿐이 아닙니다. 일부 종교인들의 흰 손도 별로 떳떳해 보이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이며 도박판은 그래도 돈을 내놓고 그것을 토대로 돈을 법니다. 그런데 보험회사는 보험료 거두어들여 그것으로 부동산이며 주식, 채권투자를 하니 돈도 안 놓고 돈 먹는 사업입니다. 절이며 교회며 성당에 들어오는 시주나 헌금도 제 쓰일 곳을 잘못 찾으면 돈 안 놓고 돈 먹는 사업에 다름아닙니다. 서울 도심에는 수십, 수백억 원짜리 교회 건물이 여럿이요 변두리 우리 동네 교회도 이번에 거금 백억 원을 들여 신축을 했답니다. 급기야는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대형 교회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ꡒ정말 돈 안 놓고 돈 먹는 장사 잘도 했구나.ꡓ 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내 입으로 꾸지람을 하고 싶어집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수도회 규칙서 제4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ꡒ세속에서 재산을 갖고 있던 자는 수도원에 입회할 때 그 재산을 공동소유로 할 것을 기꺼이 원해야 한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던 자는 밖에서 가질 수 없던 것을 수도원에서 얻으려 하지 말 것이다.ꡓ
우리 사회에서 스님, 신부, 목사 같은 성직자가 되면 일단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고 의식주도 안정이 됩니다. 외국 여행 다닐 여유도 생깁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러지 말라셨습니다. 성직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부와 명예며 안락한 생활을 즐기다가 아들한테까지 이를 물려주는 것은 스승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스승님은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달아 알도록 온 마을을 다니며 전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식량자루나 여벌옷도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백억 원짜리 건물을 짓고, 아들에게 물려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나라에서 나오는 극빈자 생활보조금의 일부를 떼어내 바치는 산동네 할머니의 시줏돈으로 훤한 얼굴에 고급 차 타고, 슬슬 외국여행 다니는 스님도 더 이상 부처님 제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았던 부자 청년의 모습은 성서에 기록되어 몇 천 년을 두고 우리 입에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성서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그는 우리보다 아니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이입니다. ꡐ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ꡑ 묻는 진지함이 그렇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무슨 즐거운 일이 없을까 찾는 나에 비하면 몇 수 위입니다. 내 몸 사랑하고 남는 힘이 있어야 비로소 내 이웃에 관심을 가지는 나는 그 부자 청년 앞에서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실 내 이웃을 내 몸만큼 사랑하기도 무척 어렵지만 그렇게 하려면 나와 내 이웃이 서로 나누어 먹으면 됩니다. 이웃과 더불어 나의 몫도 일단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부자 청년에게 ꡒ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라.ꡓ 하셨습니다. ꡐ아니 그럼 나는, 내 몸은 무얼 먹고 무얼 입고 어디에서 사누.ꡑ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했던 부자 청년도 이웃을 제 몸보다 더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그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가 따르는 스승 예수님을 ꡐ실로 가난한 사람ꡑ의 표양으로 제시합니다.
ꡒ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은 동정녀의 모태에 잉태되시어 어머니의 몸 안에 갇혀 계셨습니다. 놀라운 가난이여! 그분은 작은 마구간에 태어나시고 강보에 싸이셨고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체포되시어 멸시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얼마나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까. 이분이 바로 제가 찾던 가난한 사람들의 으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ꡓ
예수님은 속으로는 하느님의 부요를 누리면서 그저 겉으로만 가난한 체하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몸과 마음이 비참하게 가난한 분이셨습니다.
가난해지라는 당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아버지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이들이여, 부디 쌀 한 톨 짚신 한 켤레도 만들지 못하고 놀고 먹는 그대들의 흰 손을 부끄러워할지어다.

<인권위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