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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권위
  • 승인 200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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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잡지 야곱의 사다리 1월호 김형태 변호사


경향잡지 - 야곱의 사다리 2001년 1월호 김형태(변호사)

돌아보니 스승님 따라 길 나선 지 30년입니다. 그 긴 세월 제대로 길(道)을 걸어왔는지 두렵습니다. 하나 곰곰 생각해 보면 1970년이니 2000년이니 하는 역법(曆法)이 종종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지 싶습니다. 마치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나 한양 착각하게 합니다.
현재가 어디 있습니까. 1초? 100분의 1초? 1조 분의 일초도 우리가 '현재'라고, '지금'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그 길이가 있는 한 이미 지금 현재라고 딱 꼬집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가 없으니 현재가 쌓인 과거도 '과거'라 이름 부를 수 없고, 다가올 현재로서의 미래도 '미래'라 특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 달력은 우리를 속입니다. 마치 '나'와 동떨어진 '시간'이라는 놈이 우리를 내버리고 달려가기나 하는 듯이 말입니다.
이 몸이며 저 산에 수북히 쌓인 낙엽이며 북한산 문수봉 옆에 떠오른 달이며 저 '공간'은 또 어떻습니까. 저 바위덩이는 한없이 단단하고 저 바위 틈새 흐르는 샘물은 바위를 녹이지만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저 바위며 물을 쪼개고 또 쪼개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분자, 원자, 소립자, 쿼크 그보다 더 들어가면 하나의 확률, 파동일 뿐. 물체라고 '존재'라고 만져보고 쳐다볼 수 있는 그 무엇은 사라져버린다고 가르칩니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있고 스승님 따른 지 '30년'도 지나갔으니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후계라는 스티븐 호킹이 지난번 서울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우주는 12차원이다. 1차원이 점이라면 2차원은 면이고 3차원은 공간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 그 영화 속의 인물들은 스크린이라는 2차원 세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갇혀있다. 화면에 꼼짝도 못하고 들러붙어 울고 웃는다. 우리 인간이나 인간을 둘러싼 이 현상계도 시간, 공간이라는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들러붙어 있다."
우리가 물리학의 분류방식으로 3차원에 속해있는 한, 본래는 없는 '시간'이며 '공간'의 제약을 피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3차원, 4차원, n차원을 넘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으니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나'라는 에고(ego)를 버리라 하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나선 지 30년이 지났건만 이 '나'라는 에고의 굴레는 저 영화 스크린 막처럼 '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 어느 종교신문이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왜 종교를 믿느냐는 물음에 대다수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라, 누구 마음의 평화? 나의 마음의 평화?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며 하느님은 누구며 나를 위해 죽어주는 저 벼 낟알이며 소며 돼지는 누구? 이 물음의 답을 찾으러 길 떠난 지 오래나 아직도 갈 길이 먼 듯합니다. 나이는 자꾸 먹어 내 큰 잘못까지도 어여삐 보아주시던 어른들은 한 분 두 분 떠나가시고 내 조그만 잘못에도 마음 상하고 슬퍼하는 아랫사람들만 자꾸 늘어갑니다. 고등학생 내 딸이 그렇고 후배가 그렇습니다.
본디 중학생 때 스승님 따라 길을 나서면서도 나의 구원이나 내 마음의 평화가 이 길의 종착역은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여름 수련회 때는 탕자의 비유를 주제로 가당치 않게 건방진 설교까지 했더랬습니다. 염소새끼 한 마리도 안 주셨다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큰아들을 꾸짖으며 우리 스승님의 제자들은 염소새끼를 안 주셔도 아니 지옥으로 떨어져도 진리이신 선생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큰소리를 쳤더랬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큰소리는 여전하지만 그 길이 내가 따라가야 할 옳은 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루 굶으면 배고프고, 이틀 술 안 마시면 술 고프고, 사흘 친구 안 만나면 정에 고파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여섯 가지 경계(境界)에 끄달리는 우리가 어찌 나를 버릴 수 있으랴. 3차원에 붙들려있는 '존재'가 '존재'를 벗어나려 애씀은 마치 우리가 보는 영화 속의 남녀 주인공이 2차원에서 3차원의 우리에게 튀어나오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스승님을 3년 간이나 곁에서 모시고 배운 야고보, 요한조차도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라고 어리석은 부탁을 드렸고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는 야고보,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이 '나'가 죽어서도 그대로 '나'인 채로 천당 가고 싶어하는 우리이기에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던 여자가 부활 후에는 도대체 누구 아내인가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이름은 김 아무개였고 부모 처자는 아무개들이었으며 직업은 변호사였고 성격은 어땠던 '내'가 이 '나'라는 에고,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버지 품에 가는 것이 아님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스승님의 이 말씀도 이 '내'가 무슨 '천사'가 된다는 것이 아님 또한 분명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하는 이 '나'가 버려진 후 아버지와 하나일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가 여러 교리로 여러 말을 하지만 아버지께서 스승님을 통해 가르쳐주신 길은 결국 하나입니다.
이 '나'를 버리고 비워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길.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길, 도(道)가 아닙니다.
어제 고등학생 딸이 제 친구 아버지가 마흔둘의 나이에 암으로 죽었다며 울었습니다. 죽음을 전하는 딸이 내가 아니요 그 죽은 사람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니 이 시간과 공간으로 짜여진 세상은 너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내 먹이가 되어야 할 쌀이며 고등어가 있고 나의 성격 때문에 슬퍼하는 후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하나이신 당신의 자녀이며 이 모두가 당신에 돌아가 사실은 너도 없고 나도 없다고 예수님도 가르쳐주셨고 또 다른 많은 스승들도 그리 보여주셨습니다.
내 친구 스님은 이리 전해줍니다. 깨닫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으며 설혹 깨닫는다 해도 깨달음을 새롭게 얻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이리 화답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당신의 자녀이며 그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내가 지나온 30년의 길을 어디로 더 갈 필요도 없습니다. '하각차몽 답전문후(何覺此夢 答前問後)', "이 꿈에서 어찌 깨어날까 답은 이미 앞에 있고 문제는 뒤에 있네."
그렇습니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이미 답 속에 들어있는데 어디서 무슨 답을 찾습니까.

<인권위칼럼>